이극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세좌(世佐), 세우(世佑), 세걸(世傑)이 그들이다. 그 중 세우의 경우 9대에 연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조선 중기의 명신 윤근수의 문집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실려 있다.
당시 조선은 연산군이 왕위에 있었는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기득권 세력과 혁신 세력의 충돌이었다고나 할까? 광주 이씨 집안은 누가 보아도 첫째로 치는 훈구 공신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세좌에 와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권력은 불과 같아서 너무 멀리 있으면 춥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타죽을 수도 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지혜를 잊었기 때문이리라.
이세좌는 성종과 연산군 대를 지나며 벼슬이 판서까지 올랐고 광양군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성종 13년(1482년) 8월 16일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궁궐 밖 사가(私家)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때 그 사약을 전달한 사람이 불행히도 이세좌였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좌승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훗날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자 보복의 살육극을 펼치는데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이세좌였다.
연산군이 누구인가? 죽음은 이세좌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이세좌에게는 수원(守元), 수형(守亨), 수의(守義), 수정(守貞)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수의와 수정은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관리로 재직 중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네 아들 모두를 사형에 처했다. 당시 이세좌의 막내 삼촌이던 이극균을 비롯해 광주 이씨 집안에서만 30여 명이 극형을 당해야 했다. 훗날 이극균의 6대손이 영의정에 오르는데 이 분이 그 유명한 이덕형이다.
성현이 인정한 조선 최고 문벌이라던 광주 이씨가 몰락해 버린 것은 바로 이때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후손들은 역설적으로 사림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 그 중심 인물이 수원의 아들 이연경(李延慶)과 수정의 두 아들 이윤경(李潤慶)과 이준경(李浚慶)이었다. 참고로 나의 가계(家系)는 이세좌, 이수정, 이윤경으로 이어진다. 연산군도 이세좌의 아들들은 모두 죽이면서도 손자까지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것일까?
열 살도 안 된 이윤경, 이준경 형제는 충청도 괴산 땅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다행히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바람에 윤경, 준경 형제는 고향인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두 형제의 어머니 신(申)씨는 조선시대 자녀교육의 귀감이 될 만큼 두 아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신씨는 ‘과부가 키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깥출입을 가급적 금지시키고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직접 가르쳤다.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는 사촌형인 이연경이 두 형제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광주 이씨 집안이 사림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중종 때 조광조와 가까웠던 이연경 때문이었다. 조광조가 목숨을 잃은 기묘사화 때 이연경도 사형을 당할 뻔했다. 그러나 중종이 연산군 때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사형수 명단에서 특별히 그의 이름을 빼 주었다. 그 후 이연경은 공주에 칩거하면서 서경덕, 노수신등과 같은 큰 인물들을 키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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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정 송덕비 제막 후 국왕 교지의 문중 고문서를 살펴보고 있다 / 뒤 오른편의 석비가 송덕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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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守貞)의 아들 윤경(潤慶)과 준경(浚慶)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정치 때문에 화를 입었으면 그쪽은 다시 돌아보지 않을 법도 한데 그들은 꿈이 있었고 고집도 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훗날 영의정에 오르게 되는 청백리 재상 이준경은 어릴 때 꿈이 ‘정승이 되어 종묘사직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청렴하고 엄정했기 때문에 혼탁하기 그지없었던 명종 때 사람들은 두 형제를 ‘이봉(二鳳)’이라 불렀다.
강직한 면에서는 형인 이윤경이 한 수 위였다고 하고, 동생인 이준경은 정치와 행정 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훗날 이준경은 자기 아들이 문과 급제 후보자 명단에 오르자 자신이 직접 아들의 이름을 지우며 “이 아이가 그만한 그릇이 못됨은 아비인 내가 잘 안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나의 직계 선조인 이윤경은 벼슬이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1555년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 전주 부윤(지금의 전주 시장)으로 봉직하고 있던 이윤경은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긴 공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승진했으며 5년 후 병조판서에 올랐다. 또 을묘왜변 당시 아우 이준경도 전라도 순찰사로 왜적 격퇴의 총책임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이후 광주 이 씨는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당파로 볼 때 기본 바탕이 남인(南人) 성향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인조반정 후 조선은 줄곧 서인(西人)과 노론(老論) 세력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남인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이윤경의 5대손인 이휴징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여섯째인 이영만(李英晩)에 이르러 우리 집안은 경상도 의령에 터를 잡았다. 그때가 17세기 중반 무렵, 조선 중반기부터 불어 닥친 당파 싸움의 회오리 때문에 중앙 조정으로의 진출이 사실상 봉쇄되자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 같다.
광주 이씨 문중에서 정승과 판서가 여럿 나오고 오늘날에도 큰 인물이 많이 나왔다. 우리 직계는 아니지만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은 중시조 둔촌의 아들 지직의 세 아들 중 셋째인 예손의 후손이다. 나는 지직의 둘째 아들인 인손의 둘째 아들 극감의 후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인손의 넷째 아들 극돈의 후손이다. 이중재, 이순재, 이경재, 이주영, 이종구 등 전현직 국회의원, 이명재 전 검찰총장도 광주 이씨인 것을 보면 명문가의 뿌리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할 만하다.
여기에 밝힌 광주 이씨 선대의 화려한 일대기와 선비정신에 비길때 나의 삶은 실로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사재(私財)를 헌납하여 교육재단을 만든 것이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사업이지만 조상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두렵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태어나서 만수유(滿手有)하였으니 이제 공수거(空手去)하리라, 이 말로 내 인생 이야기의 끝을 맺으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