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제 회고록 _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회고록은 지난 삶의 기록이다. 사실 삶의 기록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삶이라는 것은 현현(玄玄)한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에서부터, 수많은 생각과 느낌과 배움이 녹아 있는 총체인 것이다. 회고록은 이것을 거두어내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회고록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소설, 시, 수필이라는 문학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 수도 있으며, 그렇기에 회고록은 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삶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부터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 고전이 총체적으로 녹아있는 회고록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우선은 회고록 기록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한정적이다. 단순한 삶의 기록으로 스스로 한계를 지어서 서사의 두레박이 자기 사유의 깊은 우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오늘날 회고록이 천편일률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이렇게 회고록을 거창하게 정의하면 프로 작가가 아닌 보통사람들은 회고록을 쓸 수가 없다. 그러므로 회고록은 자기의 살아온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옛날 얘기하듯 편하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는데서 출발해야 하고, 또 그게 본령이다. 
 
- <종합 인문서>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없는 회고록

회고록을 쓰는 나이가 대개 80세 전후이고, 80년 역사라는 것은 실로 현현한 것이다. 80년동안 그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으며, 느꼈으며, 생각했을까. 회고록은 그 자기의 모든 것을 투여할 수 있는 장이다.  

박판제 회고록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는 선생의 사유를 아낌없이 투여한 회고록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회고록이 아니다. 종합 인문서라고 이름 붙여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라지거나 잊혀진 우리의 옛말을 개발하고 복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저녁놀이 서산에 비껴나가는가 하면 어느덧 샛별이 지고 종달새가 뜹니다. 만산홍록(滿山紅錄)이 2월화(二月花)를 이기는가 했더니, 어느새 가을바람에 그 잎이 떨어집니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는 눈이 내려 겨울인줄 알았더니, 금세 또 봄은 와서 새로운 잎으로 녹색을 풀어냅니다.’

- 고어(古語)와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 고전문학이 어우러진 서사
 
머리말 첫 문장부터 정감어린 고어의 풍미가 느껴진다. 첫 문장만 그런 게 아니라 회고록 전편 내내 이런 유려한 서사인데, 머리말에서 선생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특히 내 자식들에게 읽히려고 쓰는 책이라 내가 일찍이 어른들로부터 듣고, 독서를 통해 터득한 동서고금의 숱한 고사(故事)와 명구(名句)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결코 현학적인 취미거나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영예를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오랜 시대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걸러지고 선택된 인생의 철학이자 위대한 진리이기에 좀 더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자는 뜻과 함께 오늘을 사는 우리 인생에 접목시켜보자는 의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성현도 생활인이라는 것이지요.’

마침 머리말을 들여다보는 김에, 선생이 머리말에 밝힌 회고록을 낸 이유를 소개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달리 희귀한 경험을 하면 그것을 사진이나 기록으로 남기거나 말로써 남에게 알리고 싶은 간절한 내심(內心)의 욕구가 일어나는 법이고, 사람마다 살아온 경험은 남다르고 특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도 여러 빛깔의 의미로 주저리주저리 하고 얽히고 설킨 지나온 오십 평생의 역정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냈습니다. 이 책을 내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 회고록을 낸 이유
 
이것은 아마도 선생 개인의 이유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회고록을 내는 원론적이고 일반적인 욕구가 될 것이다. 계속 두 번째, 세 번째 이유를 보면 이 회고록의 원형을 체감할 수 있다.  

‘벽촌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그나마도 몰락한 가정환경을 탓하지 않고 한 장 한 장 바벨탑을 쌓아올리며 나름대로 꾸준히 인생을 계획하고 개척해온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지나온 삶의 기록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으로 감히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적었습니다. 장자(莊子)도 쉰이 되어야 마흔아홉 살의 잘못을 안다고 했듯이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고 반성하는 기회를 마련하여 여생을 더 풍부하게 살아가는 계기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을 내는 둘째 이유입니다.’

‘배움의 시기를 돌이켜 본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공직생활의 기록까지도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정리하는 앨범이요 필름이므로 옛날 사관(史官)의 사초(史草)처럼 진솔하게 치부까지도 굴절 없이 적나라하게 엮으려고 애썼습니다. 결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자식들에게 애비의 살아온 내력을 진솔하게 밝혀두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이 책을 내는 셋째이유입니다. 따라서 금석문(金石文)이나 주도문처럼 사실을 도장하거나 일부러 꾸미려고 분을 바를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천착 이전에 이 회고록의 문체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고향 풍경에 대한 서술 하나를 더 소개한다. 

‘한편 드무실 남쪽 심천가에 ‘홍실봉’이란 깎아지른 듯한 천길 기암절벽이 있었다. 무산(巫山) 12봉과 풍악산을 이기는 절경이며, 천년 묵은 심산이 있다고 전해지는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처럼 사립을 나서면 앞이 탁 트여 비옥한 사들의 논들이 다 우리 것 인양, 천군만마를 거느린 쾌승장군(快勝將軍)인양,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할 패기마저 용솟게 하는 그런 고장이었다. 그런데도 어린 나는 가끔 두고 온 우리의 옛 고향 송지마을을 꿈속에서 만나 한없이 기뻐하고 끝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전형적인 산골 마을인 경남 합천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침 집안에 닥친 풍파로 진학을 접어야 하는 좌절을 맛본다. 이때의 심경을 선생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소송패배로 우리는 조반석죽(朝飯石粥)으로 근근이 연명을 하고 있었다. 여기다가 통화까지 개혁되어 우리는 땡전 한 푼 구경할 수 없었다. 식구들은 일 년 열두 달 고기 한 칼 못 얻어먹어 비린 것에 주려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들어앉아 구천이처럼 절치부심 섶에 자고 쓸개를 씹는 와신상담의 결의를 단단히 굳혔다.’

그 시절, 산골마을에서의 삶이란 것이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남다른 면일 것이다. 운명이었을까. 자연스레 접어드는 농사꾼의 길과는 본능적으로 다른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소년 박판제는 집안의 농사 일을 도우며 중학강의록으로 독학을 하고 한학도 공부했다. 어느 때건 집안 형편이 풀리면 이 좌초에서 벗어나 도시로 나가 진학을 할 꿈을 은밀히 키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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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6세 되던 해 선생은 결국 서울로 향한다. 서울에 누구하나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골에서 읽었던 <학생계> <학원> 잡지사의 주소밖에 없었다. 잡지사를 찾아가 부탁을 하면 사환이나 일자리를 주선해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무모한 그 믿음은 산산이 깨졌다. 학원사 사장은 환고향(還故鄕) 할 것을 강권할 뿐이었다. 

남산에 있는 학원사에서 쫓기듯 나오자 선생이 서울에서 더 갈 곳은 없었다. 그때를 선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 장안이 크고 넓다지만 나는 강렬한 소외감과 허탈감과 상실감을 그때 짓씹었다. 한길이 넓고 사통오달이었지만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하여 발부리가 어디에 닿는지조차 몰랐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나중에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나는 남산공원의 높은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이때 선생은 사람 하나를 만난다. 남산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낮선 군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군복은 입었지만 계급장이 없는 것이 정규 군인이 아닌 듯 했다. 그는 어디서 와 무얼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이 고향을 떠난 동기와 <학원>사에서 딱지를 맞은 경위를 설명하자 그는 있을만한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앞장섰다. 선생이 그 군인을 따라 간 곳은 지금의 리라초등학교 자리에 있는 천막이었다. 그곳은 남산직업소년학교로 중부경찰서 권응팔(勸應八)이란 순경이 불량아를 선도하기 위해 세운 야간학교였다. 전쟁고아나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불우한 소년을 모아 밤이면 대학생이 와서 가르쳐주는 야학이었다. 
 
- 상경(上京)과 낮선 군인과의 만남

별수 없었던 선생은 이곳에서 야간 중학과정을 배우고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주근야독이었다. 박판제 선생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이 지점이다. 서울에 올라왔다는 것과 낮선 군인을 만났다는 것! 

첫째 상경했다는 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별것 아니지만 전쟁직후인 당시로서 보면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당시 보통의 농촌마을의 소년이 가는 길은 정해져 있다. 자연스레 농부가 되는 것. 

특히 소년 박판제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가족이나 친지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거나, 누가 올라오라거나, 하다못해 친구의 꾀임이 있었다거나 하는 이런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박판제 자신의 독단적 판단이었다. 이것을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박판제의 특징이라고 일단 전제하고 넘어가자. 

둘째는 낮선 군인을 만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군인은 지금의 남산 KBS자리에 있던 방첩대의 대원이었다. 어쨌거나 박판제가 방첩대원을 만나게 된 것은 서울에 올라왔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다. 그러니까 상경과 방첩대원과의 만남은 한 셋트로서 연결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생면부지의 방첩대원과의 만남이 박판제 운명에 있어서 터닝포인트라고 했을 때, 그는 귀인(貴人)이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방첩대원은 단지 박판제가 오갈 데 없이 남산 계단에 앉아 있을 때, 직업학교를 소개해주었다. 도움은 도움이지만, 이것을 귀인이라고까지 정의 내리기에는 좀 어색하다. 더욱이 방첩대원은 나중에 박판제가 상경할 때 가지고 온 얼마 간의 돈을 자기가 맡겠다고 하더니 가지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따라서 회고록에서도 술회하거니와 박판제는 방첩대원에 대해 특별히 고마운 마음도, 또 서운한 마음도 피력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을 귀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방첩대원을 통상적 귀인으로 칭하기는 어렵다. 허나 방첩대원은 박판제의 인생을 좌우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 사소한 사건 하나가 인생을 결정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대개 일회성으로 치부해버리기 십상이다. 때로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사건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되어 결국 인생전반을 규정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나비효과라는 게 있다. 브라질 열대 우림 속 나비 한 마리의 작은 날개 짓이 텍사스에 허리케인을 몰고 온다는 나비효과법칙 말이다. 1.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벌레를 나뭇잎에서 떨어뜨려 그 아래에서 놀고 있는 원숭이 털 속에 떨어지게 된다. -  2. 원숭이는 그 벌레로 인해 가려워 긁다가 옆의 열매를 떨어뜨리고, 열매는 돌에 부딪쳐 돌을 구르게 된다. - 3. 돌은 큰 바위를 지탱한 작은 돌을 쳐서 밀어내면서 작은 산사태를 일으키게 되고 이런 변화는 물의 흐름을 바꾸어 화산의 구멍을 막고 약한 지반을 꺼지게 하면서 화산 폭발을 일으킨다. 

따지고 보면 인생도 어떤 사소한 일 하나가 계속 연결되어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는 그 사소한 일이 연결되어 거대한 결말로 이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그럼 점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자신의 현재에는 어떤 한 원인이 있었고, 그것이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는 것을 한번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군인의 소개로 남산직업소년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과정을 마친 선생은 덕수고등학교에 진학 했고, 덕수고등학교를 마치자 고려대 상대에 진학한다. 고려대 재학시절 선생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고, 졸업 3년 후에는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한다. 그 후 재무부에 들어가며 공직에 몸을 담았고, 청와대 비서관을 거쳐 공직자로서는 최고위직인 장관까지 지내고 퇴임한다. 장관이라는 최종 도착지의 발원지(發源地)는 방첩대원과의 만남이다. 시원지(始原地)를 따진다면 상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관까지 지냈으므로 공직자로서는 최고위 자리까지 올랐으니 성공적이었다고 할 때, 그것은 방첩대원과의 만남이라는 최초의 사건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박판제 선생의 인생은 서울 상경과, 남산에서의 우연히 만난 방첩대원과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는 사소한 한 사건이나, 어떤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은 참 무서운 일인 것이다. 만약 박판제 선생이 최고위 공직자를 지낼 운명이었다면, 신은 소년 박판제로 하여금 방첩대원과의 만남으로 그 운명의 첫 단추를 꿰게 한 것이 아닐까?  
 
이밖에 이 회고록의 특징적인 점 두 가지를 짚어보고 싶다. 

1. 단점도 과감하게 드러낸 고백의 미덕
중언부언 하거니와 회고록을 ‘자기자랑’이라고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고, 기실 회고록들이 그럴만한 단초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박판제 선생의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는 대체적으로 진솔한 서사에 단점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미덕이 있다. 

전후 맥락이 있지만, 선생의 진솔한 고백을 보자. 

‘내가 외로울 때나 곤경에 처해졌을 때도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는 듯 했다.’

‘사람을 정주고 마음 주면서 사귀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오늘의 고독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솔직히 반성한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는 대단히 화려하게 보였는데, 실인즉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빠진 호랑이처럼 소외감과 고독감과 무력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히 있을 수 있는 단점이고, 이것을 진솔한 고백의 예시냐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회고록을 분석하고 있는 우리 히스토리 편집부가 확언컨대, 이런 정도의 자기 단점에 대한 고백도 매우 인색하다는 것이다. 

2. 표지 디자인의 조악성
히스토리 편집부는 이 회고록을 총체적으로 평가했을 때 ‘회고록 베스트10’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딱 하나의 단점이 있다. 표지 디자인이다. 

책은 내용이 좋아야 하지만, 내용이 좋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이 표지의 중요성이다. 책의 표지는 한마디로 그 책을 펼쳐보고 싶게 해주어야 한다. 이 회고록의 표지는 이 책에 대해 궁금증을 별로 유발시키지도 않지만 책의 품격이 낮게 보인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느낌도 특색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회고록의 표지는 속의 내용을 크게 훼손할 정도로 조악하다는 것이 우리의 평가다. 이 회고록의 옥에 티다.
 
- 명작 회고록(名作 回顧錄)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박판제 선생의 회고록, <나는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는 보기 드문 수준작이다. 회고록(回顧錄)의 명작(名作)이라고 칭해도 한 점 손색이 없다.

 
  최종성 회고록 "금잔디 동산 수풀은 우거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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