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과 책을 낸다는 것은 일체적 행위이자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쓴다는 것은 세상에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것이고, 책은 그 매개체이기 때문에 나무에 있어 뿌리와 가지의 차이처럼 역할만 다를 뿐 성격은 같다.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작가가 쓰는 이유를 “쓰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거니와 원초적으로 자기 내부로부터 무언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정치인의 자전에세이란?
그러나 정치인이 글을 쓰거나 책을 내면, 이처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이다. 세상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실 책이 쓰일 목적에 따라, 글을 쓰는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머리로 쓰느냐, 가슴으로 쓰느냐의 차이는 천양지차이다. 임채호의 자전에세이, ‘16년 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도 그런 세상의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6년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은 2014년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쓰고 낸 책이다. 정치인이 선거를 앞두고 책을 내는 것은 홍보용으로 써 먹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평이라는 것이 서사를 고찰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목적성과 별개로 임채호의 ‘16년 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은 분석하고 평가할 가치는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면, 이 책을 내고 출판사나 저자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16년 전 그날과 16년 전 오늘’이라는 책의 제목에 관해서다. 내용을 떠나 책의 제목이 관심을 끌었다는 것은 출판사나 저자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일이다. 각설하고, 추리소설 같은 인상을 받는 제목을 가진 이 자전에세이는 기실 저자인 임채호가 16년 전 정치에 입문할 때의 초심이 16년 후인 지금도 변함이 없느냐는 질문에서 비롯되고 있다.
1998년 5월이었다. 나는 학원장실에 몇 시간 째 서성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펼쳐졌던 봄날의 화사한 풍경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며 상점 간판의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과연 내가 할 일인가?’라는 생각을 골똘히 하는 참에 ‘아니 사람이 그렇게 없나?’ ‘왜 나 같은 사람한테 이런 제안을 하지?'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끼어들어왔다.
최희준 의원. 아니 ‘하숙생’을 부른 가수 최희준으로 나에게는 더 익숙한 사람이다. 정말 그는 6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사람이다. 그는 이제 국민회의 안양 동안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그 분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에게 시의원출마를 권유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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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080세대다. 유신독재와 5·18광주와 6월항쟁을 거치며 성장하고 청년기를 보냈다. 많은 동시대인들이 시대와 불화하고 저항하다가 종내는 감옥으로, 고문으로, 혹은 죽음을 맞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시위에 참가하는 등 몇 번의 가투에 나가보기는 했으나 나는 내 개인생활에 전념하며 80년대를 건너왔다. 그러니 광주와 80년대 독재와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다가 쓰러졌던 분들에게 가슴 한 켠에 부채의식이 앙금처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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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정치를…?’이란 생각이 들었다가도 최희준 의원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주민들과 밀착한 풀뿌리정치이니 당신이 여태까지 해온 지역사회활동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나는 창밖을 보았다. 봄날의 어두운 거리에 오가는 남루한 차림의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낙후한 지역,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비산동지역의 민낯이었다.
지역주민과 밀착된 정치, 그렇다면 대통령, 국회의원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시의원의 몫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6년 전 임채호가 정치라는 선택을 하면서 가졌던 고뇌다. 민주화 과정에서의 방관자였지만, 그 부채의식으로 가난한 지역주민에게 헌신하겠다는 것이 정치를 하겠다는 결단인 셈인데, 그동안 많이 들었던 정치인들의 상투적인 변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임채호의 정치를 평하는 지면은 아니다. 그의 삶과 서사의 매치와 공감대라는 측면에서의 고찰해 보는 것이다.
16년 전 정치입문 당시를 회상했던 임채호는 16년 후 오늘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오지는 않았는가? 처음 출마를 고뇌하며 가졌던 초심을 지금까지 가져왔는가? 솔직히 부끄럽다. 변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도의원 임기 만료를 앞두고 16년, 아니 그동안의 나의 삶을 한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이 책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렇게 서론을 적고 본격적으로 16년간의 자신의 정치궤적을 샅샅이 들춰보는 것이다. 16년 후 오늘 이후의 길을 당당히 갈 자격이 있는지, 아니면 길을 멈춰야 할지, 다른 길을 가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십자가의 고행 같은 처절한 반성의 길을 갈 것인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16년 간의 정치궤적, 진솔한 고백의 여부가 이 책의 가치를 결정
그러므로 이 책은 16년 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 간의 궤적, 16년 동안의 기록이다. 그 16년 간의 기록을 여기서 설명하거나, 평가하거나, 분석할 수는 없다. 다만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성하거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는 점에서 16년 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은 출판기획으로서는 의의가 있고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이 책의 최종적인 가치와 성공 여부의 판단은 읽는 이가 그 의의를 인정할 서사의 공감대 여부일 것이다. 즉, 16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전제가 있는 만큼, 자신의 오류까지 진솔하게 고백하고, 그 위에서 16년 후의 내일을 모색하려는 서사의 진솔함과 성실함이 느껴지느냐는 것일 테다.
그런 점에서 평자의 입장에서는 아쉽다. 이 책의 편집자는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달면서, 조심스레 ‘기획에서의 문제의식을 실제 글에서 구현해 냈다고 답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사실 출판사의 기획자는 출판 프로젝트를 맡으면 이상(理想)적이라고 할 만치 ‘좋은 책’을 낼 수십 가지 기획 강령(?)을 상정한다. 그러나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게 되고, 하나씩 강령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하여,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강령을 포기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결국 그 포기를 얼마만큼 최소화시키느냐가 관건이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때론 어떤 강령을 포기하지 않으면, 책 출판을 접어야 하는 상태까지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출판을 완전히 접고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운 대개의 영세한 출판사들은 타협을 택한다. 출판기획자가 ‘장인정신’이라는 철학을 관철시키는 조건은 결국 경제적인 면이 가장 크게 좌우하는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출마를 앞둔 정치인의 책이라는 목적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현역 정치인의 자전에세이로서 비교적 수작에 속하나 한계도 분명한 것이다.
엿 보이는 한 사람의 삶과 운명
임채호는 정치를 하기 전 학원을 경영해 돈도 벌고 지역사회에서 명성도 떨쳤다. 그것이 풀뿌리 정치에 뛰어 든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정치를 평할 수는 없으나, 이 책에서 느껴지는 그의 인생의 특징을 보면 어렸을 때부터 자립심이 강하고, 사업가적 기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한다.
중학교 역시 나는 안산중학교를 다녔다. 그때는 가난한 학생에게 옥수수빵과 우유를 나눠주던 시절로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 역시 집에서 수업료 대주기가 벅찼다. 3남 5녀를 키우고 가르친다는 것이 벅찼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연히 나는 “채호가 중학교 들어가면 수업료 대주는 것이 벅찰 거”라는 어머니의 한숨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궁리 끝에 나는 토끼를 키워서 내 학비는 내가 벌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토끼를 한두 마리씩 키웠지만 그렇게 키워서는 수익이 별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대량사육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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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 용돈으로 네댓 마리를 키웠다. 새끼를 치면서 계속 마리 수를 불려나갔다. 그렇게 한 6개월여가 지나니 100마리 정도로 불어났다. 100마리의 토끼를 키우려면 풀과 푸성귀가 엄청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방과 후 나는 풀을 베어다 먹이고, 마을에 버린 푸성귀를 채집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야 했다.
대량사육을 하니 꽤 짭짤한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새끼를 낳으면 분양하고, ‘앙고라’종은 털을 깎아서 팔고 ‘자이언트’종은 고기용으로 팔았다. 중학생 치고는 꽤 큰 경제활동이었다. 그 돈으로 수업료도 너끈히 내고 당시로서는 구입하기 만만찮았던 자전거도 한 대 사서 통학을 했다. 따라서 나는 중학교부터 수업료를 집에서 내 준적이 거의 없다.
인생과 운명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회고록이나 자전에세이의 미덕
어떤 사람의 운명에 있어, 크든 작든 어떤 일이나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보면 그 전에 싹수가 보인다는 것이다. 임채호의 삶에 있어서 중학교 때의 일화는 그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특징적 단초로 다가오기도 한다.
회고록이나 자전에세이의 테마는 인생이다. 인생은 타고난 프로그램의 작동인가, 아니면 백지에서 그려나가는 창작인가? 이런 관점에서 회고록이나 자전에세이를 읽거나 접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한다. 정해진 운명인지, 아니면 만들어나가는 것인지, 그것을 발견하고, 나아가 세상의 이치를 조금이라도 깨닫는 기제가 될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와 우주의 원리를 단초라도 알아챌 수 있다면 크게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자신의 삶에 참고하고, 혹은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회고록이나 자전에세이의 미덕(美德) 아니겠는가!
임채호 자전에세이 '16년 전 그날과 16년 후 오늘' | 투데이미디어출판사 2014. 2. 26.
ISBN | 978-89-961830-5-1 (03990).
페이지 220 | 판형 신국판
by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