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여주(驪州)는 옛적부터 유서 깊은 고을로 손꼽혀왔다. 멀리 단양(丹陽), 충주(忠州)를 거쳐 흘러오는 여강(驪江)은 신륵사(神勒寺)와 마암(馬岩)을 감돌아 여주읍 중심부를 휘감고 이포(梨浦), 양평(楊平)을 거쳐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면서 한강의 주류를 이룬다. 이 유장한 물줄기를 중심으로 수려한 풍광은 관광명소로도 유명하다. 읍을 중심으로 십여 리 거리에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고 신라의 고찰 신륵사와 여흥 민씨(驪興 閔氏)의 시조가 나왔다는 동굴 마암, 송우암(宋尤庵) 선생을 기리는 대로사(大老祠)가 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시골답지 않게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육조(六曹)를 연상할 만큼 흥청거렸다고 한다. 읍에서 지척인 제비여울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은거지였고 이완용(李完用) 생가와 세도하던 안동 김씨네 별장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을 살며 푸른 꿈을 키워온 흥천면 외사리(興川面 外絲里)는 읍에서 가까운 10여 킬로 거리의 농촌이다.
우리 선대(先代)의 고향은 문경인데 내가 태어나기 전에 단양을 거쳐 충주에서 살다가 여주로 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나의 증조부는 세거지(世居地, 대대로 내려오던 땅)인 문경에서 사오백 개 석의 추수를 받는 향촌(鄕村) 부자로 지내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항일의병이 봉기하자 의병대장 이강년(李康䄵) 휘하의 이필희(李弼熙), 이병덕(李炳悳) 등 의병장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고향을 등지고 타관으로 전전했던 것이다.
나는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 임자(任子) 5월 23일에 충주에서 아버지 장수영(張壽永), 어머니 태성선(太性善)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두 살 되던 1914년 봄에 충주에서 아버님이 배 두 척을 세내어 이삿짐을 나누어 싣고 한 배에는 바깥식구, 다른 한 배에는 안식구가 타고 외사리로 이사왔다.
이때 일행 중에는 우리 식구 외에 조부와 깊은 인연이 있는 광암 이규현(廣庵 李圭顯) 씨 가족이 동반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의병장 이필희의 친조카로서 조부와는 금계 이근원(錦溪 李根元) 선생(화서 이항노 華西 李恒老와 학문적 정통이 같은) 동문으로 한학과 의술이 뛰어나 우리 집의 스승이자 가의(家醫)였던 것이다.
이때 국권을 잃고 앞날이 암담한 유지인사(有志人士)들은 소극적인 보신책으로 풍수지리상의 피난지를 찾았는데 그래서 명당으로 소문난 외사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조부와 부친도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곳으로 이사 왔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 외에 서울에서 낙향한 이민응(李敏應) 참서(參書) 댁과 이 참서의 매부 되는 이승지(李承旨) 댁, 이보(耳報)의 명인 주금원(朱錦園), 신약(神藥) 제조가 민청우(閔靑牛), 도학자 신직당(申直堂), 재력가 심송사(沈松史) 같은 분들이 모여 살며 암암리에 나라와 국민의 운명을 개탄하면서 표면으로는 단순한 학자들의 집단주거지를 표방했던 것이다.
내가 취학연령이었던 6, 7세 때는 인근 현방리(玄方里 이천땅)와 여주땅인 이포에 각각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취학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유독 우리 동네 어른들만은 이광암(李廣庵), 신직당(申直堂) 선생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게 했다. 나는 다섯 살 때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웠고 나중에는 삼촌들과 함께 광암 선생 글방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배웠다. 차차 나이가 들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내 위치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남들은 머리를 깎고 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는데 나는 무엇인가? 이러다가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차츰 불안과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나 부모의 의사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밴 나는 감히 반항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자력으로 앞을 열어볼 생각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서울고등학교에 유학중인 넷째 매부에게 편지를 보내 보통학교 전 학년 국어(日語) 독본을 사서 보내달라고 했다. 이것으로 우선 일본어를 자습할 예정이었다. 얼마 후에 책이 우편으로 배달되어 왔는데 자습서까지 딸려 와서 독학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글공부 외에 틈틈이 일어공부에 몰두했다. 차차 요령을 깨달을 만한 어느 날 아버님에게 발각되어 책은 압수되고 자습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우리 집 어른들의 생각은 일본의 것은 무조건 원수의 것, 학교도 일본놈이 세운 것, 머리를 깎는 것도 일본놈 풍속, 교복(양복)을 입는 것도 일본식이라고 간주하여 무조건 배척하셨다. 이러한 극단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은 당시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막연하지만 현실지향적인 생각을 굽히지 않고 내연(內燃)을 계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