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초입선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32년 초여름, 갑자기 집에서 전갈이 왔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잠깐 다녀가라고만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었다. 11회 「선전」이 열리고 있는 중이어서 좀 미적미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황급히 내려가면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서울에서 공부하기로 한 1년의 기한을 넘겼기 때문에, 귀환하라는 분부를 내리시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상상은 빗나갔다. 아버님은 화업(畫業)의 순조로움을 기특해 하시면서 긴급호출의 사유를 말씀하셨다. 다름이 아니라 관할 주재소에서 동네 노인들에게 강제 단발령(斷髮令)이 내렸으니 무슨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도 시류의 변화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우리 가문은 유학(儒學)에 젖어 ‘신체발부는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완고한 사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것을 모면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더구나 일경(日警)의 강압에는 절대로 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말씀인즉 “네가 관할 이포 주재소에 찾아가서 잘 처변해 보라”는 것이었다. 주재소에는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서 찾아가 일본인 소장을 만났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자인데, 그날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내 소개를 하고 나서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고 했더니 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아, 장 선생!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축하합니다” 하고는 나의 「선전」 입선을 아는 체 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나는 서투른 일본말로 민심의 향배를 설명했다. 우리 집안 어른들뿐만 아니라 외사리 사람들 모두 유학에 철저한 분들이고 나이도 연만해서 상투를 자르는 것은 오히려 민심의 역효과를 초래할 염려가 있으니 관용하는 게 어떻겠냐고 유도했다. 주재소장은 뜻밖에도 선선히 내 말을 받아주면서 고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어른들의 걱정은 해소됐고 동네사람들까지도 내가 무슨 대단한 수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치하해서 도리어 계면쩍었다.
며칠 후 나는 다시 서울에 와서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을 찾아 나섰다. 그때 마침 수표(水標) 다리 건너에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가 운용하는 ‘육교한어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선생과 유진태(兪鎭泰) 씨가 합심해서 세운 중국어 학원이다. 월남 선생은 명성이 자자하던 독립지사여서 그 분이 세운 학원이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좋은 학원이라 생각되어 바로 입학원서를 내고 절차에 따라 학업을 시작했다.
월남은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이 무렵 자신을 따라다니며 감시하던 종로경찰의 일본인 형사가 감기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그 감기는 대포(大砲)로 쏠 수 없나” 라고 비꼬았다는 일화가 있다. 학원 원장 역시 독립운동가이던 안필중(安必中) 씨였고, 지도교사는 연전(延專) 교수이던 오규신(吳圭信) 씨와 상해에서 오래 활동하던 유정열(柳廷烈) 씨, 중국인 강사로 조수정(趙樹正) 씨가 있었다.
야학(夜學) 1년 코스의 육교한어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나는 서투르지만 중국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졸업장을 받던 날 관수동(觀水洞) 이궁(泥宮) 안에 있던 중국요리집 ‘대관원(大觀園)’에서 사은회를 열었다. 대관원은 지은 지 50여 년이 된 건물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중국요리집이었다. 이 학원의 관례가 사은회 석상에서는 반드시 중국어를 쓰게 되어있어 선생과 제자는 물론, 동창생끼리도 중국말로만 대화를 나눴다. 이때 동문이 약 20명으로 기억되는데 성명을 기억할 수 없고 그 후 모두 어찌되었는지 소식이 끊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