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와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은 화가로서 문필가로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적지 않은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다.
근원은 일찍이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서 광복 후 서울미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월북했고, 수화는 일본의 일본대학 예술학과를 나와 귀국 후에는 작품제작과 그룹활동을 하다가 역시 서울 미대교수가 됐다. 근원이 1904년생이고 수화는 1913년생이어서 약 9년의 연령차가 있으나 두 사람은 친근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나는 이들과 일정(日政) 때부터 교우관계를 맺어오다가 서울 미대가 첫 출발을 할 때 근원과 나는 동양화과, 수화는 서양화과 교수로 같이 일하게 되어 같은 직장의 동료로서 한층 긴밀한 사이가 됐다.
수화는 키가 크고 성격이 활달한 멋쟁이 화가였다. 생활의 폭이 넓어서 교우관계가 다양하고 화우들뿐만 아니라 문필가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해방 후 미 군정 때는 미군장교, 문관 등 미술애호가들과도 친교를 맺었다.
미대 재직 때는 우리 동료들이 그의 집 노시산방(老柿山房)을 방문이라도 하게 되면 곧잘 막걸리 파티를 열고 소장한 고미술품을 내보이면서 호쾌한 담소를 교환,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조선 백자 항아리와 고려청자 대접, 소박한 옛날 목기 등은 모두 일품이었는데, 특히 대형 유백(乳白) 항아리는 진품 중의 진품이었다. 그것을 정원의 큰 반석 위에 올려놓고 달이 뜬다고 큰 소리로 외칠 때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수화의 작품 가운데 학, 달 백자항아리, 매화, 사슴 같은 동양화 고유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수화가 그만치 전통 정서가 몸에 밴 때문이겠으며,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그의 모더니즘적 작품 세계에도 그 기류에는 서양적이기보다는 동양적인 정서가 보다 농축되어 있는 듯하다.
수화는 6.25동란이 발발해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들어오던 날 학교에 들러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자리에서 “에이 통쾌하다”고 말해 모두가 아연(啞然), 그의 사상을 의심했는데, 나중에 보니 통쾌하다는 말이 북의 남침이 통쾌하다는 말이 아니라 무례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증오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서울의 함락이 임박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보다 한발 앞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었다.
1.4후퇴 후 부산에는 서울에서 내려오는 화가, 문인 등 많은 친지들이 광복동과 남포동의 다방에 모여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주 만난 친구들은 미술 쪽에는 수화, 소전, 제당, 박영선, 김병기, 이종우 등이었고, 문학 쪽에는 김동리, 조연현, 기타였는데, 우리들의 주요 화제는 이상하게도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고 미술, 문학계 관한 이야기와 프랑스, 유럽 등 현대 미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견(管見)을 피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때 수화와 김동리가 피카소에 대해서 격론을 벌인 것을 기억한다.
수화가 뉴욕에 왔을 때 나는 워싱턴에 있었는데 수화나 나나 초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어서 서로 위로하며 지냈다. 나는 3년 만에 귀국하고 수화는 차츰 생활의 안정을 찾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여 미국뿐 아니나 유렵 여러 곳에서도 초대전을 가졌다. 헤어진 지 여러 해, 반가운 만남을 기대했는데, 불행하게도 1974년 만리타향 뉴욕에서 한참 원숙기인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다지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근원과는 서울미대 같은 동양화과 담당이어서 학사(學事)관계뿐만 아니라 회화론, 예술관 등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했고, 때로는 혼란기의 사회와 학원문제에 관해서도 격의 없는 대화를 했는데, 내가 본 근원은 자유와 평화를 신봉하는, 화가라기 보다는 학자 같은 사람이었다.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고서화나 골동품에 남다른 이해와 취미를 가지고 있었으면, 동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좋은 수필도 썼다.
한 토막 일화를 소개하면 미대에 근무 중일 때인데 아침에 출근해서 보니 근원 특유의 까만 턱수염이 없었다. 웬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그 전날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떤 미국 군인이 갑자기 자기 턱수염을 쥐고 흔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몹시 불쾌하고 모욕감을 느껴서, 즉시 면도칼로 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때 근원은 낮 모르는 미국 놈에게 수모를 당한 것에 깊은 분노를 느꼈던 것 같았다.
국대안(國大案) 반대 학생 데모가 일어났을 때 주동자를 퇴학 처분했는데, 근원은 그것에 불만을 품고 사표를 쓰기도 했다. 그 후 동국대학 교수가 된 뒤 잘 못 만나다가 6.25난리가 일어나고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10여 일 만에 서울미대 학장이 되어 나타났다. 그는 서울 미대 전직 동료인 우리들을 소집, 파면조치 하고 인민군과 유엔군의 전투상황을 설명하는데, 인민군을 찬양하는 어조가 얼마나 격렬한지 전 날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이 느껴졌다. 그 후 3개월간의 그의 행적은 전혀 알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