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은 서구문명의 발상지이고,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역사와 유적지 고장이며, 세계를 주름잡던 대영제국, 그리고 프랑스는 미술의 왕국이라 불린다. 이 주요 나라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세계인들의 관심의 대상이며 특히 서구문화가 세계를 풍미한 이후 거의 선망과 동경의 초점이 되어왔다.
우연한 기회에 이른바 유럽 일주여행을 떠나며 나는 마음속으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즉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들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세히 참관할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그 지방의 사적(史蹟)과 풍속, 풍물 등을 되도록 차분히 살펴보도록 생각했다. 그리하여 김포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 북극을 돌며 장차 눈앞에 전개될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기대와 환상에 부풀어 있었다.
1975년 10월 18일 아침. 파리 오클리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중 나온 이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느강과 그 뒤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콩코르광장을 지나면서 왼편으로 멀리 개선문이 보일 때 ‘아, 이제 파리에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날은 항공여행의 피로와 시차에서 겪는 신경의 혼선을 가라앉히기 위해 푹 쉬기로 하고 호텔에 들어 휴식을 취했다.
파리에 왔지만 이제부터 여행스케줄은 파리구경을 최종으로 미루고 우선 다른 나라들을 먼저 들리기로 했다. 독일에 빨리 가야 할 사정도 있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자세히 보아야 할 곳이 파리이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 독일로 떠나기로 했다.
독일
독일 비행기인 루프트한자를 타고서부터 제일 먼저 언어의 장벽에 부딪혔다. 이틀 동안을 대한항공 편으로 왔기 때문에 언어의 불편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서툰 영어조차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퀼른 공항에 내려서 간단한 입국수속과 세관 검사를 치를 때 영어는 도시 불통인 듯 서로 눈치로 때려서 넘기기는 했으나 앞으로의 일이 난감하기만 했다.
퀼른 공항에는 그곳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딸아이 부부가 나와서 반가이 맞았고, 불편 없이 며칠을 보내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유명한 퀼른돔(大聖堂)과 아이들이 유학하고 있는 퀼른대학도 둘러보았으며 수도인 본에서 우리 대사관도 방문했다. 며칠 묵는 동안 내가 받은 독일의 인상은 그 말의 억양에서부터 무뚝뚝한 감정이 엿보였고, 시가와 상점들은 깨끗하게 정돈되고 여유가 흘러넘치는 듯 했으나 어딘지 가까이 하기 힘든 배타와 독선적인 싸늘함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박물관에 들었을 때 마침 그 박물관 주최로 <동양고서전시회(東洋古書展示會)>가 열리고 있었다. 주로 중국의 옛날 명필들의 글씨와 일본 고서작품들이 진열 중이었는데, 내가 한국의 화가라는 것을 알고 관장이 특별히 친절하게 안내해주면서 한문 글씨를 그대로 내려 읽으며 설명을 할 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관장 괴퍼 박사는 독일에서도 유명한 동양학자로서 중국, 일본, 인도 등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여려 차례 다녀갔으며 경주와 해인사가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했다.
벨기에
며칠 뒤 독일을 떠나 브뤼셀로 갈 때 기차로 독일과 벨기에의 국경을 넘으면서 참으로 이상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국경이라고는 하나 무슨 이렇다 할 국경다운 표지하나 있는 것 같지 않고 경계선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어느 평범한 작은 역에 기차가 멈추었을 때 복장이 다른 벨기에 승무원들이 교대하는 듯 하더니 차는 그대로 떠나고 조금 있다가 새 차장이 차표 검사를 하고, 이어 관리로 보이는 사복차림의 남자가 여권조사를 하는데 그 태도가 그렇게 부드럽고 친절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란 말인가? 제 나라 안에 휴전선이라는 어마어마한 국경 아닌 국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어서 차가 브뤼셀역에 도착할 때까지 망연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이 짙어오는 평화로운 들녘에는 어느 나라 소유인가 무심한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브뤼셀은 알뜰하고 정돈되고 비교적 윤택해 보이는 짜임새 있는 도시인 듯 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그랑플라스(GrandPlaceㆍ옛날 상인들의 본부)의 고풍어린 건물들과 몇 번 잃어버렸다 찾았다는 유명한 <오줌 눕는 동자상>도 밤거리 관광이기에 조명이 휘황한 포도 위에 차를 세워놓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음 날 왕립미술관에 들었는데, 우선 깨끗하게 정돈된 진열실에는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조각 작품들이 규모 있게 전시되어 있고, 채광과 조명이 조화를 이룬 많은 방들에는 사실과 추상의 회화작품들이 균형 있게 전시되고 있었는데 벨기에 출신의 화가들의 인물화 대작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한 가지 요행이었다고나 할까, 마침 브뤼셀 공보관 전시장에서 특별기획으로 전시되고 있는 프랑스 지방미술관 소장의 미발표 작품들과 마티스의 데생 특별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의 하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