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공항에서 런던행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연발한 것은 런던의 짙은 안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개가 걷힌 런던의 오후는 드물게 본다는 쾌창한 날씨여서 기분이 유쾌했다. 공항에서 영국 수속을 할 때 언어가 통하는 것이 우선 다행이었으나 어딘가 영국인 다운 깐깐함과 냉정함이 공항 직원들의 동작에서 실감되었고, 인도나 홍콩 식민지의 유색 입국자(有色 入國者)에 대해서는 한층 까다로운 것 같이 보였다.
런던에는 호텔 예약 등 사전에 연락이 없이 온 터라 공항 안내소를 찾아가 중급 정도의 호텔소개를 부탁했더니 안내양이 여기저기 전화한 끝에 주소 하나를 적어주면서 조용한 호텔이니 찾아가 보라고 했다.
공항버스 시내 터미널 근처에 있는 그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오래된 낡은 건물에 조금 큼직한 주택을 여관처럼 꾸며놓은 엉성한 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서 살펴보니 어설프기가 우리나라 지방 도시의 3류호텔 정도같이 보였다. 실망하여 망설이고 있는 참에 주인인 듯한 허술해 보이는 중년 남자가 반겨 맞아주었다. 우선 이 친구의 말의 발음이 아무래도 영국인 같지 않았고, 응대하는 태도 또한 털털한데다가 유머스러한 데가 있어 처음의 실망과는 달리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안내원을 따라 방에 들어가 보고 또 한 번 실망했다. 우선 실내 분위기와 침구 등이 청결해보이지 않았고, 욕실과 세면대가 공동으로 되어 있어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왕 들어온 길이니 참고 하룻밤만 자고 옮기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침 이튿날 식당에서 그 주인과 마주쳐 대화를 나눈 다음 생각은 달라졌다.
생각했던 대로 그 주인은 영국인이 아닌 이탈리아인이었다. 식탁에 마주 앉아 구수한 화술과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서 겪는 고충과 향수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부드럽고 여유 있는 태도가 불현 듯 정이 가고 주문한 아침 식사가 나왔는데 객실 분외기와는 달리 깨끗한 식탁에 정갈한 음식이 마음에 들어 며칠을 그 집에 묵으며 다음 기회에 다시 런던에 오면 또 이 <웨더비호텔>에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의 우리 대사관에는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최종익(崔鍾益) 공사가 있어, 수일동안 폐를 끼쳤다. 마침 주일이어서 차로 런던시내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매주 토요일에 있다는 버킹궁검 앞의 의장대 분열행진과 국회의사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타워, 대영박물관 등 주요한 곳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대영박물관은 상상했던 대로 세계적인 대박물관이었다. 규모가 너무나 커서 자세히 보려면 적어도 몇 주일은 결려야 될 듯싶었다. 그 방대한 수장량에 우선 놀랐고 내부 진열에 있어서 얼핏 보면 잡다한 인상을 받기 쉬우나 조용히 관찰해보면 몇 갈래로 체계를 세우고 또 정리를 해가면서 전체를 종합시키는 방법을 채택하여 인류문화사의 포괄적 파악이 가능하게 끔 용의주도한 진열효과를 살린 것은 역시 어디까지나 영국적인 치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그 중 이집트와 그리스 실(室)에서 그 나라들의 엄청난 유물들을 대할 때는 한때 세계를 지배한 대영제국의 위세가 한눈에 보이는 듯, 이 세계적인 대영박물관을 소유했다는 자랑과 함께 힘을 배경으로 한 탐욕의 심벌처럼 느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런던의 변화가 피카디리서커스를 중심으로 사프스베리 가(街) 좌우에는 많은 갈림길이 있고 그 근처에는 영화관, 술집, 상점, 음식점 등 크고 작은 가게들리 충분히 늘어서 있는데, 이곳이 런던 제일의 환락가라 한다. 밤에는 히피풍의 젊은 남녀들의 난무장이 되고 무질서의 폭력과 범죄가 자행되어 어느 삼류국의 뒷골목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신사의 나라 영국! 거리를 걷고 오가는 사람들을 대하면서 무심코 느껴지는 것은 어쩐지 젊고 씩씩한 활기보다는 사양에 기우는 권위를 애써 바라보는 초라한 허세가 실감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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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대영박물관 전시실 [사진출처 : 나와고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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