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세 시간 뒤 로마공항에 내렸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의 하나인 로마는 여로 모로 나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입국 수속을 끝내고 공항버스로 시내로 들어오면서 지난날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이 나라가 현재는 어려운 처지에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시내 중심가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고적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허물어져 가고 있는 듯 했고 중고차들이 무질서하게 달리는 지저분한 거리, 일 없이 방황하는 듯한 사람들 등 어딘지 모르게 안정되지 못한 인상을 받았다.
진작부터 관광국 이탈리아 여행에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경험자의 말을 기억하는 나는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를 잡아타고 지인의 집을 찾아가는데 운전사의 어물쩡하는 태도를 주의깊게 살폈으나, 역시 외래객인 나는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가까운 거리를 일부러 돌아서 먼 것 같이 속이고 과다한 요금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공항 환전소에서 잔돈을 못 바꾸었기 때문에 큰돈을 주고 거스름돈을 달라고 했지만 무언가 알아듣지 못하는 수다를 떨며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이 곳 역시 언어의 장벽은 마찬가지였다.
우리 대사관의 후의로 로마 사정에 밝은 교포 안내원을 한 분 소개 받아 로마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를 안내해 준 이는 전문 안내원이 아니라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로마를 보고 로마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없는 훌륭한 친구였다.
바티칸 제국이 자리 잡고 있는 로마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문명의 중심지이고 이곳에 있는 주요한 고적들은 대부분이 교회사의 전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찬란한 업적도 결국은 순화된 종교 정신의 한 개화요, 결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바티칸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벽화, 천정화를 보고 우선 그들의 절륜(絶倫)한 정력에 압도되었다. 이 거대한 벽화들의 구상과 묘사는 초인적인 능력을 밑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인 <12사도상>과 <밀월의 창조> <노아의 홍수>, <아담과 이브의 낙원추방> 등 거작들은 인간능력의 무한을 과시하는 듯 실로 세기의 일대 위관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성당을 꼽는다면 파리의 노트르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독일의 퀼른돔 등을 꼽을 수 있겠으나 건축의 규모나 내부의 호화로움에 있어 단연 로마의 성 베드로대성당을 제일로 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설계로 된 이 성당은 장장 2백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하니 그 웅대한 계획과 줄기찬 지속력에 감탄할 뿐이며 한번 이 성당 문에 들어서면 우선 그 장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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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베드로대성당 [사진출처 : 허니문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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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 요소요소에 안치된 성신제상(聖神諸像)들의 조각과 벽화 드높은 궁륭을 가득 메운 정채(精彩)어린 천정화, 아름드리 통대리석 열주(列柱)들, 정교무비(精巧無比)한 모자이크로 뒤덮은 밑바닥 등 어느 한 구석 소홀한 데가 없는 구조와 호화찬란한 장식은 과연 사원으로서 세계 제1급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바오로 성당에 발을 옯겼을 때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장중하고 엄숙한 기상이 감돌아 여기가 정말 신성의 전당이구나 하는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유적과 크고 작은 성당들을 보았으나 옛날 기독교가 박해받을 당시에 교도들이 숨어 살았다는 땅굴 성당 겸 묘지 카다콤바와 베드로가 변절하여 이탈했다가 예수를 만나 뒤돌아왔다는 쿼바디스 성상,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세 번 넘어졌다는 헤로데의 계단, 실물 십자가와 형관(荊冠)의 파편이 안치된 베네딕트 성당 등은 비신자인 나로서도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다. 로마에서 유적을 살피고 성당들을 참관하다 보면 기독교의 생생한 사실들이 눈앞에 떠올라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숙연한 감회를 갖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끊이지 않는 순례자들과 성당 마당에 줄을 잇는 교민의 행렬들을 바라볼 때는 그레도 아직 세상은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다. 베니스로 떠나기에 앞서 로마에서는 끝으로 보르게제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이 박물관에는 라파엘로, 보티첼리, 반 아이크 등의 널리 알려진 원작들과 이탈리아가 낳은 유명한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 등 우수한 명작들이 수장되어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짜임새 있는 알뜰한 박물관이었다. 여기에서 베르니니의 사실 조각을 보면서 문득 베드로 성당에서 본 다빈치의 <피에타>상을 생각했다. 그의 청년기 작품인 페에타는 다빈치의 사인이 들어 있는 유일한 걸작으로서 아마도 <밀로의 비너스>와 함께 절세의 명작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쾌청한 이날 오후 기차 편으로 로마를 떠나 밤 8시경에 베니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다만 관광을 위해 1박을 하였는데 밤이었지만 수상도시답게 물비린내가 코를 스쳤고 발동선의 모터소리가 밤새껏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음날 아침 수상버스(발동선)를 타고 잠깐 관광길에 나섰다.
알려진 대로 수중도시 베니스는 온통 습기에 젖어 있는 듯했고 이 고장 주민들의 생활 방식이 새삼 궁금했다. 모두 뱃길로 연결되는 집고 집, 골목과 골목, 오리나 갈매기처럼 물에 떠서 사는 그 생활양식이 관광객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