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1박, 쾰른을 거쳐 파리에 온 것이 11월 7일. 우중(雨中)에 기차 편으로 쾰른을 떠나 저녁 7시에 파리에 도착했다. 1개월여에 걸친 강행군으로 파리에 오자마자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평균 줄잡아 20리를 보행했다고 칠 때 약 6백리 길을 걸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미술관, 박물관 등을 참관할 때와 명승 고적지를 찾을 경우, 그리고 각 도시의 시가지를 걸어서 다닌 것을 생각하면 실제 보행거리는 훨씬 많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휴식 없는 정기 여행은 나로서는 지나친 고역이었다.
파리에 오니 또 집에 돌아갈 생각이 총총해서 별로 쉬지도 못하고 밤낮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파리에는 몇몇 가까운 친지들이 있어 매일 같이 미술관, 박물관, 화랑 등에서 시간을 보냈다. 맨 먼저 인상파미술관에 들렀다. 음산한 날씨에 강한 바람이 불어 코트자락을 여미면서 전시실에 들어섰다.
지하까지 3층으로 된 이 미술관에는 문자 그대로 유렵의 명장(明匠)과 대가들의 걸작품이 가득해 채워져 있었다. 세잔, 고갱, 마네, 모네, 드가 등등의 이미 세상에 널리 소개된 원작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 작가의 작품들도 역작, 쾌작들이어서 전 시대 화가들의 창작태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했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작가의 얼이 응결되어 있는 듯 약동하는 생명감에 부딪힐 때 전위라는 이름의 현대 미술을 재검토, 재평가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문화의 시대성을 긍정적으로 계산한다 하더라도 감흥의 고도한 순화와 기교의 박진한 추구가 예술 창조의 기본요건이라 생각할 때 시대를 초월하였던 일관된 논리는 견지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루브르박물관에 들어가서는 취해버리고 말았다. 우선 첫째, 미술관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압박감을 느끼었고, 둘째, 너무나 많은 수장량에 진력을 느낄 정도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진열실, 보아도 보아도 한이 없는 수장품, 그저 시장바닥처럼 들끓는 관광객들 틈에 끼어 어리둥절하는 형편이었다.
인상파미술관에서와 마찬가지로 루브르에서도 전 시대 예술가들의 그 성실함과 진지성, 그리고 생명을 걸고 덤벼든 듯한 정력적인 창작태도에 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신기(神技)에 가까운 구성과 구도와 사실 역량은 회화기법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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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브르 박물관 외경 [사진출처 : 익스피디아 트래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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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현대미술관, 로뎅박물관, 기타 미술관들과 화랑가 구석구석의 작고 큰 갤러리들을 돌아보며 다신 한번 파리 화단의 변천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며 ‘예술도 역시 시대 사조와 함께 기복부침(起伏浮沈)할 수밖에 없는 것이로구나’라고 느꼈다.
대부분 추상경향의 작품들과 간혹 구상풍의 그림들이 섞여 전시되고 있는 많은 화랑들은 화랑 자체가 의외로 초라하고 좁은데 놀랐다. 물론 호화판 화랑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상상했던 대 파리의 갤러리로서는 너무도 빈약한데 의아할 뿐이었다. 화랑의 외형뿐만 아니라 그 속에 진열되어 있는 작품들도 나의 안목으로는 그다지 감탄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연말이 가까워 즉시 시즌이 지나가고 파장 풍경을 본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것이 현재의 파리 화단의 수준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방향 감각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이런 승화된 정열의 연소도 세련된 감각의 표현도 찾아보기 힘들고 다만 포화상태를 벗어나 보려는 안간힘과 그와 정비례로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 영합하려는 들뜬 기분이 넘쳐 흐르는 듯했고 그것은 만용이고 탈선이어서 마치 설익은 과일을 씹는 것과도 같이 풋내음이 물씬 풍기는 듯했다.
물론 짧은 기간에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일부만을 보고 단정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앞서 현대미술관에서 근대에서 현대에 걸침 큐비즘, 포비즘 시대를 전후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열정적이고 찬란한 향기를 발산하는 그러한 감동적인 고조된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루오,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등의 작품 앞에 서면 각기 특이한 개성을 보이면서도 한결같이 융화된 정서와 음율이 감도는 농축된 조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미술도 영광의 황금시대는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적막한 감회를 가져본다.
현대의 방황과 고민은 비단 예술계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순과 갈등으로 뒤엉킨 현대 인간사회의 난기류는 또 어느 한 나라, 한 민족, 한 사회에 국한된 병폐만도 아닌 것이다. 파리의 명소라는 몽마르트의 피갈, 마드랜느 사원 근방의 상젤리제 거리, 이곳의 밤과 낮은 사치와 허명과 윤락과 허탈과 범죄가 엇갈리는 활무대인 것 같다.
월여(月餘)에 걸쳐 7, 8개 낮선 나라는 돌고 다시 오클리공항에서 KAL에 올라 서울로 향할 때 기상에서 북극의 빙원을 굽어보며 느낀 것은 역시 가장 정겹고 가장 순박하고 허물없는 곳이 조국이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