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 약 한 달 동안의 일정으로 동남아 7개국 예술원을 돌아봤다. 이웃나라들의 예술원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예술원 민영업(閔泳業) 조사과장, 고인이 된 문화분과의 조연현(趙演鉉) 씨와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 나갔다.
일본 예술원은 조직ㆍ형태ㆍ기능이 모두 우리나라 예술원과 비슷했다. 다만 미술이 중심인 점이 우리와는 다른 특색이었다. 정원이 120명(결원 17명) 인데, 1부 미술이 56명, 2부 문예가 30명, 3부는 연극ㆍ음악ㆍ무용으로 셋을 합해 27명 정도였다. 일본화ㆍ서양화ㆍ조각ㆍ서예ㆍ공예ㆍ건축을 포용하고 있는 미술이 회원숫자로도 월등히 많았다. 이 같은 현상은 일본 예술원의 출발이 처음부터 미술 중심으로 된 데 기인한 것 같았다.
일본 예술원은 문학분과 속에 번역이 들어 있었다. 예술원 건물도 순 일본식으로 지어서 중정(中庭)에 자갈을 낀 재래색 정원을 만들어 놓았고, 건물 안에 회원 휴게실ㆍ도서실ㆍ작품전시실이 다로 마련되어 있었다.
동경에서 다음 예정지인 필리핀으로 갔는데, 마닐라공항에 내리니 12월인데도 화끈하게 더웠다. 가로수 그늘 밑에서 낮잠 자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직자가 많다는 이야기이겠고, 까무잡잡한 얼굴의 젊은 사람들이 호텔 주변에 서성대다가 외국 손님을 에워싸고 따라 붙는 것은 확실히 위험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필리핀에는 다른 나라 예술원 같은, 즉 아카데미는 없었고, 다만 유사기관인 중앙문화센터라는 것이 있어, 우리나라 세종문화관과 문예진흥원을 합한 것 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건물부터가 엄청난 규모였다. 이 거대한 문화센터에는 여러 개의 극장과 전시장이 있고, 그 중 한 방에 필리핀 고대 유물을 진열해서 박물관 같은 인상을 주었다. 마닐라 만(灣)이 탁 트인 바다와 울창한 야자나무 숲이 열대의 특징을 실감케 했다. 무더운 이틀 밤을 자고 싱가폴로 향했다.
싱가폴은 유럽이나 미주(美洲) 선진국 못지 않게 잘 살았다. 산뜻한 시가지와 건물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친절해서 정겨웠다. 특히 싱가폴 에어라인은 비행기도 산뜻하고 시설도 좋으며 스튜어디스도 일본 여성 이상으로 상냥했다. 싱가폴은 다만 경유지였기 때문에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에 바로 태국으로 떠났는데, 첫 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짧은 체류가 너무 아쉬웠다.
태국에도 예술기구는 없었다. 다만 태국 작가협회 회장 샤파 테봐큘이라는 여류작가를 만나 보니, 그녀는 한국에서 펜클럽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에 와 본 사람이었다. 한국은 역사 깊은 나라고,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라고 회상했다.
그때 마침 방콕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가 멋모르고 들어간 호텔이 북한 선수본부여서 기분이 착잡했다. 처음에는 이 기회에 자연스럽게 북한 사람들과 대화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들이 우리 방에 운동복 차림으로 불손하게 쳐들어 와서 “한 동포끼린데 찾아와서 인사도 안 한다”고 생트집을 잡았다. 그들은 아마 우리를 한국의 정보원으로 오해 했던 모양이다.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정체를 알고는 순순히 물러갔지만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외국에 나와서까지 소위 동족이 이럴 수가 있는가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 날로 바로 호텔을 옮겼다.
다음에 도착한 인도의 첫 인상은 ‘가난한 나라구나’ 하는 것이었다. 늦은 밤중에 뉴델리 공항에 내리니 대합실은 걸인의 숙박소 같았다. 맨 바닥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즐비하게 누워 있는 사람들, 그 남루한 모습은 그대로 거지들 같았다. 택시 운전사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다 낡은 지프차 택시에 인도 고유의 옷을 걸친 운전사는 우선 담배를 한 개 청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인도 수도 델리의 호텔, 식당, 상점 거리들을 돌아보고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루한 옷차림의 시민들의 행렬, 중심가 대로(大路) 복판을 서성거리는 소떼들, 널려 있는 소의 배설물, 처량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인도에는 음악아카데미, 문학아카데미, 미술아카데미 등 세 개의 아카데미가 서로 독립적 기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 각 아카데미는 80명의 운영위원과 20명의 집행위원으로 조직, 우리나라 문예진흥원처럼 예술 진흥사업이 주 업무였다. 다만 우리나라 예술원과 비슷한 체제로 아카데미에서 추대하는 Fellow가 있는데 추대되는 사람은 예술가로서 최고의 명예이며, 추대될 때 연금을 받는다고 한다. 역사 깊은 인도에 고유한 그림이 없고 유화(油畫)뿐인 것도 이상했다.
대만(臺灣)에도 우리나라나 일본과 같은 예술원은 없었다. 다만 중앙문화학원(中央文化學院)이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앙문화학원과 국립고궁박물원(國立古宮博物院), 그리고 역사박물관(歷史博物館) 등을 돌아봤는데, 중앙문화학원에서는 우리 일행 세 사람을 위해 연주회(고전음악, 무용)를 열어줘서 황공할 정도였다. 세계적인 대박물관인 고궁박물원은 그 규모나 내용이 방대해서 과연 대만의 자랑거리요, 중국 고대문화의 보고(寶庫)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