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0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도 하고 제작도 해왔지만 개인전이나 그룹전 등 전시회는 많이 하지 않은 편이다. 어림잡아 개인전 10여회에 불과하고, 단체전 같은데 참가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적다. 소위 작가가 그렇게 발표 횟수가 적었다면 무능하고, 게으르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활동적이지 못하고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경쟁시대에 항상 뒤처지는 자신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작품을 남 앞에 공개하는 전람회는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특히 개인전의 경우 알몸으로 무대에 서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한 일이므로 여간한 뱃심으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핑계일지 모르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 흔한 전시회 기회를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막바지인 88세가 되던 98년에 나는 행운의 <미수전(米壽展)>을 갖게 되었다. 서울미대 동양화 동문 제자들이 축하의 뜻으로 마련해준 전람회다.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 나의 신작 20여 점을 내놓았는데, 많은 미대 동문들과 가까운 친지들의 축하 속에 성황을 이루었다.
전시회를 위해서 일부러 작품을 제작한 것은 아니고 평소에 기회가 있는 대로 구상이 떠오르면 붓을 든 작품이어서 내용의 흐름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종전의 스타일을 벗어난 작품들이 몇 점 섞여 있어서 관람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30호 정도의 <태풍경보>는 선만으로 바람의 움직임을 표현해본 것인데, 나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한 추상 경향의 그림이다. 이 작품의 화제(畵題)에서 썼듯이 1999년 12월 31일을 0시라고 표기해 장차 21세기를 맞이하는 우주와 지구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갈들이 겪게 될지도 모를 그 어떤 상상할 수 없는 격동의 모습을 태풍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형해본 추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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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경보 (1999.) / 70*68.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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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에는 삼청동 백월빌딩에 있는 가진화랑에서 <구순(九旬)기념전>을 열었다. 망백(望百)을 기리는 후배들과 가족들의 배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전시에도 미수전 이후 제작한 작품들과 서예 몇 점을 내놓았다. <레임덕(낙오된 거위)>, <세상 구경 나온 개구리>, <늙은 여우>, <단군일백오십대손(檀君一白五十代孫)> 같은 작품은 나름대로 현실풍자적인 작품들이었다.
전시 첫날 참관한 많은 분들이 나의 달라진 작품 경향에 흥미를 보였고, 각 신문들은 <단군일백오십대손>을 일제히 사진을 곁들여 크게 보도해서 도리어 고맙고도 겸연쩍은 기분이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그림이지만 평소에 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엄청난 세태의 격변을 고발하는 뜻이 잠재된 일종의 풍속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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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군일백오십대손(檀君一白五十代孫) (2001.) / 67*46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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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2003년 11월 19일로 예정된 중국 국화(國畵)의 거장 이가염(李可染) 씨와의 합동전을 나는 매우 뜻 깊은 전시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계획해온 이 행사는 중국 현대의 대표적 작가의 작품을 국내에 처음으로 초대 전시한다는 점과 그 작가의 단독전이 아니고 한국의 현존작가인 나와 함께 초대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한ㆍ중(韓中) 원로 교류전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행사계획을 통보받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가염 화백은 중국 현대 화단의 대가로 오창석(吳昌碩), 제백석(齊白石) 이후의 큰 작가다. 명성 뿐 아니라 그의 예술은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인 합동전은 여타 행사와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나로서는 차질 없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난 98년의 미수전과 2001년의 구순전, 그리고 있을 <한ㆍ중합동전>을 나의 만년(晩年)을 가늠하는 중요한 행사로 꼽고 있다.
노경에 든 나는 사고력이나 제작 의욕이 비교적 크게 손상되지 않는 편이어서 계속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있다. 혹 평가에 따라서는 노망이라고 웃어버릴지 모르나 나의 이러한 만년의 일들은 후인의 엄정한 평가에 맡기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