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自存)
나는 이 책의 원고를 쓰기 위해 붓을 들기까지 많이 주저하고 망설였다. 첫째, 자기 이야기를 제 손으로 쓴다는 것이 쑥스러웠고 둘째, 많은 사람들과 연관된 일들을 얼마나 정확하고 진실 되게 쓸 수 있겠느냐 하는 두려움과 셋째, 문필가가 아닌 내가 과연 조리 있고 앞뒤에 맞는 글을 쓸 수 있겠느냐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위 화가로 일평생 외길을 걸어온 나는 7, 80년 동안 기록과 애환이 점철된 지나온 행로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그대로 어쩔 수 없는 내 모습이고, 타인들과의 관계 역시 싫던 좋던 지울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내가 살아온 사회의 한 단면이요, 기록이라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하려하니 엄두가 나지 않아 미적거리고 있던 중 지난 해(2002.) 봄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와서 병원 신세를 지고 월여 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연래의 숙제인 몇 가지 일들이 이제 수포로 돌아가는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암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다행히 병세가 약간씩 호전되어 거동이 가능하게 되어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작업에 착수했다.
묵은 자료를 총동원하고 기억력을 되살려 거의 일 년 동안 무리에 가까운 일을 강행했다. 가족들과 내 사정을 잘 아는 후배들은 문필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했지만 나는 내 일을 남의 손을 빌리는 것이 성격상 싫을 뿐만 아니라 옷 위로 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은 일은 안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되어 보잘 것 없는 졸필이지만 그대로 엮어보았다.
원고 교정을 보면서 다시 읽어보니 한 번에 쓴 글이 아니어서 문장의 흐름이 다소 층이 지는 것 같지만 독자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 책의 자료정리를 도와준 월전미술관의 류철하 학예실장과 조성진 군, 이아라 양의 노고에 감사한다.
2003년 한벽원에서 著者
후기 –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21세기 현대의 인류문명을 한마디로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혼돈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역사와 전통의 틀이 무너지고 방종(放縱)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오늘을, 사람들은 자유요 신질서라고 말 한다. 그리하여 기존체제를 파괴하는 것이 건설이고, 원초적인 야성(野性)의 발작이 창조인 양 당연시 된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윤리와 도덕, 철학과 정서가 기본 조건인 것은 동ㆍ서가 다르지 않고 종교와 성현의 가르침 또한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인간사회는 왜 이처럼 타락했는가.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근대 서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물질중시의 사회풍조가 점진적으로 인간의 양심과 이성을 마비시키고 소유욕과 안일과 향락을 추구하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인간사회를 걷잡을 수 없는 나락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신의도 인정도 메마른 삭막한 환경 속에서 무위무책(無爲無策)한 많은 노년들은 소용돌이 치는 현대라는 격랑에 떠밀려 고독과 환멸을 곱씹으며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다. 생활에 쪼들리고 시간에 쫓기다보니 가깝던 친구가 서먹한 사이가 되고 후배나 제자들마저 어쩔 수 없이 소원(疏遠)해지는 참으로 허망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판국에 감히 사막의 오아시스인양 나 홀로 푸르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 것인가? 그러나 나는 나만의 뿌듯한 충족감에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구십 당년의 나는 아직 신상에 별 지장이 없어 몇몇 동년배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도 기울이고 정담도 나눈다. 그보다도 우리 화단의 중진이 된 옛 제자들과 수시로 만나 미술계의 동정과 해외의 새로운 문화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전통과 현대의 흐름을 탐색하고 소장한 고미술품을 감상하는 자리를 갖기도 한다.
나는 남들처럼 사업을 해서 재물을 축적하지도 못했고, 감투를 써서 영화를 누려본 적도 없다. 하지만 나는 일생동안 바르게 살고 신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해온 것만은 자부한다. 결과로 나는 순수무구한 동지들과 더불어 세속을 초월한 정취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처소 한벽원(寒碧園)은 북악산 자락 조용한 삼청동에 자리 잡고 있다. 크거나 넓지는 않지만 몇 그루의 매화와 노송과 연못과 정자가 있어 선비들의 조용한 모임을 갖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계절(四季節) 상화(賞化)와 관어(觀魚) 모임에도 우리 동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데, 참석하는 주요 멤버들을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박노수, 권영우, 이열보, 이영찬, 장선백, 송영방, 민경갑, 안동숙, 구자무, 이규선, 임송희, 정탁영, 전영화, 신영상, 이종상 등 옛 제자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오영길, 김보희, 김대원, 조환, 이왈종 같은 화단의 맹장들도 보인다.
그뿐인가. 우리 동방예술연구회의 정회원이 2백명을 육박하는데 이들 모두 한벽원의 가족이고 나의 친애하는 동지들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이 나라 화단의 동량(棟樑)들로서 이 시대 화맥(畵脈)을 이어가는 귀중한 인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울창한 원시림 속에 살고 있는 듯 흐뭇하고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2003년 한벽원 백월처에서
구십이 세, 월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