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에 나와 현초, 운당은 종종 다방(茶房)을 찾았다. 이 시절 서울 장안에 다방이란 몇 군데에 불과했고 이용하는 사람도 극소수였기 때문에 찾는 사람은 일부 문필가, 음악가, 화가뿐이어서 어찌 보면 다방 출입이 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허나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문화의 선발주자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주 갔던 다방은 서울시청 남쪽 소공동 입구 지금의 프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낙랑(樂浪)’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방 내부의 인테리어나 시설이 보잘 것 없었지만 당시로는 제법 모던한 편이었고 당시의 문화 엘리트들의 아지트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겨울이면 함박눈이 소담스럽게 내리는 밤에 외투 깃을 올리고 으레 낙랑에 들러 밤늦도록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낙랑」의 주인은 당시 영화배우로 인기가 있던 김연실(金蓮實)이었다. 김씨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단골손님인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말없이 ‘추억’을 틀어주었다. ‘추억’은 꽤 센티멘털한 바이올린 곡으로 우리가 그 잔잔한 선율을 좋아했기 때문에 김씨는 습관적으로 이 곡을 들려주었고, 주문을 안 해도 따뜻한 커피를 날라다줬다.
취초의 이름은 ‘낙랑팔러’였는데, 김연실이 인수하면서 ‘팔러’를 떼어 버리고 ‘낙랑’이라고 개명한 것이다. 낙랑은 우리나라 공예계의 원로인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씨가 경영했었다. 동경미술학교 공예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온 이씨는 이 다방을 내고 2층에는 작업실을 차렸다. 서울에 현대식 사교장의, 첫 씨앗을 뿌린 셈이다. 1931년 7월 7일 문을 연 뒤 문화계의 반응이 좋아 서울에는 다방들이 연이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순석 씨가 경영할 때는 여자 종업원이 없고 12~13세의 미소년 두 명이 차를 날랐고, 뮤직 플레이를 담당한 변동욱(卞東昱)이란 남자 한 명이 있었다. 이때의 손님들은 대부분이 예술가였는데, 아침마다 들르던 언론인 홍종인(洪鍾仁), 이전(梨專, 이화여전, 지금의 이화여대)를 갓 나온 모윤숙(毛允淑) 씨도 자주 들렀고, 이태준(李泰俊), 이여성(李如星), 김소운(金素雲) 씨도 단골이었다.
|
|
| ▲ 낙랑팔러 / 공예가 이순석 씨가 시청 남쪽 소공동 입구 지금 프라자호텔 자리에 차렸던 다방. 이 다방은 후에 배우 김연실에게 넘겨졌다 |
|
멋쟁이 대학생들도 사각모자를 벗어들고 찾아왔다. 조풍연(趙豊衍) 씨도 이따금 사각모를 옆에 끼고 살며시 들어와 음악감상을 하고 갔는데, 매주 금요일은 ‘명곡의 날’로 정해져 있었다. 대학생들과 문화인들은 다방에 한 번 주저앉으면 좀처럼 일어서지 않았다. 고요한 음악을 들으면서 센치한 시간을 즐기는 이때의 엘리트들은 확실히 후진 한국문화계의 전위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 유명한 소설가 ‘이상(李箱)’은 낙랑팔러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아예 광화문 비각 옆에 프랑스식 카페 ‘제비’를 차렸다. 그는 낙랑팔러에 붙어살면서 다방 경영방법을 배워 제비를 짭짤하게 운영했다. 우리는 낙랑을 단골로 하고 제비에도 가끔 들렀다. 이상은 제비다방에 앉아서 연필로 자화상을 그려서 다방 벽에 걸었다. 머리가 무성한 잡초처럼 그려진 자화상을 보고 손님들은 미소를 지었다. 제비에 걸렸던 그 자화상은 이상이 서울을 탈출할 때 오장환(吳章煥)에게 주어 그 후부터는 오씨가 경영하던 책방 ‘남만서방(南蠻書房)’ 정면에 걸렸다.
그 후 명동에 ‘성림(聖林)’, ‘백룡(白龍)’, ‘전원(田園)’ 등 다방이 연달아 생겼다. 전원에는 화가 화암 길진섭(華岩 吉鎭燮) 씨의 일본인 연인 오다무라(小田村)가 기모노를 입고 마담으로 나와 있었다. 그 후 화암은 안암동 고대(高大) 옆에서 그녀와 함께 살았는데, 우리가 놀러 가면 일본부인이 차를 끓여 내놓았다. 집에서 마시는 차 맛이 다방보다 훨씬 좋아서, “이제 전원에 가지 말고 집으로 와야겠다”고 농담한 일도 있다.
신고(身苦, 꼽추)를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해 화명을 날렸던 서양화가 서산 구본웅(西山 具 本雄)도 종로에 ‘모나미’ 다방을 냈다. 정동윤(鄭東潤) 씨가 경영했던 명동의 ‘후유노야도(冬の宿, 겨울 숙소)’는 일제 때 음악인들이 모이던 다방으로 음반이 많아 ‘음악다방’이란 별칭이 붙었다. 이 다방엔 김생려(金生麗), 이인범(李仁範), 김성태(金聖泰) 씨 등이 모여 음악을 감상했다.
이 무렵 현초와 나는 명동에 자주 나갔다. 전원다방에서 차를 마신 다음 으레 들르는 곳이 ‘히노데(日之出, 일출)’ 상회와 바로 이웃해 있는 ‘마루젠(丸善,まるぜん)’ 서점이었다. 히노데는 문방구와 동경에서 열리는 「제전(帝展)」과 「원전(院展)」 같은 주요한 전람회의 도록과 일본미술계의 동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을 들여다 팔았고, 마루젠에서는 유럽과 일본의 유명화가들의 화집과 예술이론 서적 그리고 세계의 유명 문학서적과 ‘이와나미(岩波)’ 문고 같은 명쾌한 신간들을 접할 수 있어 당시 문필가와 화가 등 뜻있는 엘리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때 명동은 일본인 문화생활의 중심무대였고 한국의 지성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신문화를 접할 수 있는 창구인 셈이었다.
이 무렵 충무로 3가에 ‘구하산방(九霞山房)’이라는 전문 재료점이 새로 문을 열었는데 분채(粉彩)와 봉채(棒彩), 고급 붓, 먹, 두방 같은 동양화의 필수재료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젊은 화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더욱이 일본인 여주인이 상냥하고 친절해서 부담 없이 거래할 수 있었다. 이 가게는 광복이전까지 영업을 하다가 일본인들이 철수할 무렵 고미술 감정가 홍기대 씨가 인수하였고 6.25동란 뒤 점포를 인사동으로 옮겨 구하산방이란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여 현재 성업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