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미술 연구단체 ‘후소회’
1936년 1월 18일에 낙청헌의 화우(畵友) 7~8명이 모여, 정기적인 동문전을 열기 위하여 후소회를 발족시켰다. 멤버는 나를 포함하여 향당(백윤문), 운보(김기창), 규당(한유동), 현초(이유태), 취당 장덕(翠堂 張德), 심원 조중현(心園 趙重顯) 등이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클럽이었다.
‘후소회(後素會)’란 이름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이당의 부탁을 받은 위당이 해려 임상종(海旅 任尙鍾)에게 미술을 함축성 있게 표현하는 무슨 좋은 명구(名句)가 없겠냐고 물었더니, 해려가 무심결에 “공자(孔子)말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게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위당은 무릎을 치면서 “그것 참 좋군” 하고 찬동하여 결국 두 분의 합작으로 후소회란 이름이 지어졌다.
단체만 만들어 놓고 아무런 실적이 없으면 유명무실하니 전람회를 열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후소회의 창립 사실과 전람회 계획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문화부 기자와 평론가 등 몇몇 중요 인사들과 만났다. 화신백화점 뒤편에 있는 ‘태서관(泰西館)’에서 여러 분들과 만났는데, 기자들 외에 조선일보 문화부에 있던 홍기문(洪起文)과 안석주(安碩柱), 김규택(金奎澤), 이병각(李秉珏), 그리고 매일신문의 윤희순(尹喜淳) 등이 나왔다.
「후소회」 제1회전은 후소회가 창립된 1936년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닷새 동안 태평로 ‘조선실업구락부(前*전 국회사무처 건물)’에서 열렸다.
출품한 동인은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노진식, 조용승, 장운봉, 이유태, 정도화 등이고, 이당과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이 찬조 출품했다. 소정은 이당의 스승이었던 소림(조석진)의 외손자인데, 일찍이 이용문의 도움으로 동경에 유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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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회 후소회전 때의 이당(원내)과 문도들. 1936년. / 뒷줄 오른쪽부터 필자, 조용승, 이유태, 조중현, 앞줄 오른쪽부터 축하자로 같이 찍은 변관식, 박영래, 그리고 한 사람 건너 후소회원 백윤문, 장운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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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은 남화(南畵)를 전공하는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 이당은 북화(北畫)를 하는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수학하여 화풍이 사뭇 달랐다. 고무로 스이운은 「선전」 심사위원으로 서울에도 왔던 사람이고, 유키 소메이는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있던 사람이다. 이당과 소정은 일본에서 하숙도 같이 하고,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으로 함께 다녀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래서인지 이당이 가는 곳에는 으레 소정이 뒤따랐다.
초창기의 미술평론
후소회가 창립된 1936~7년경에는 동양화 중심의 미술단체도 별로 없었고 제대로 된 화랑도 없었으며 따라서 그룹전이나 개인전 같은 것도 드물었다.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열리는 「협전」과 「선전」이 화가들의 유일한 발표기회였고 일부 화가들이 백화점 화랑에서 가뭄에 콩 나듯 그룹이나 개인전을 열 정도였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평론도 극히 부진한 상태일 수밖에 없으며 전람회 평을 하려는 사람도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이때 미술평은 조선‧동아‧매일 등 신문사 학예부에 근무하는 몇 사람이 주로 전람회 평을 써서 자사(自社) 신문 학예면에 싣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를 들면 조선일보에는 석영 안석주(夕影 安碩柱)와 웅초 김규택(熊超 金奎澤)이, 매일신문에는 윤희순(尹喜淳)과 정현웅(鄭玄雄)이 썼는데, 안석영과 윤희순은 주로 동양화 평을 썼고, 김규택과 정현웅은 서양화 평을 쓴 것으로 기억한다. 안석영은 소설도 쓰고 영화감독까지 했으며 윤희순과 정현웅은 서양화가이고, 김규택은 신문 연재소설 삽화와 만화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 서양화가인 구본웅(具本雄)과 송병돈(宋秉敦)도 가끔 「선전」 평을 쓰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미술평론은 작가들이 전람회를 본 소감을 나름대로 썼던 것 같다. 결국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아마추어로 일을 했던 것이다.
화가이기도 했던 근원 김용준(近園 金瑢俊)이 비교적 미술평을 많이 썼는데 식견과 문장력이 있어 조리 있는 글을 썼다. 일본 유학 출신의 젊은 양화가 모임인 동미회(東美會)와 백만회(白蠻會), 녹향회(綠鄕會) 같은 그룹전의 평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고「협전」과「선전」평도 썼다. 언젠가는, 작가가 평을 쓰면 안 된다고 솔직한 술회를 하여 그의 말에 공감하는 작가도 많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1949년 9월에 제1회 국전이 열리자 김용준은 장문의 평을 조선일보에 기고, 새 시대의 민족향연을 반기며 한국화의 새로운 진로에 대하여 소신을 피력하는 고무적인 글을 써서 젊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편 새 국면을 맞이한 평단도 활발한 움직임을 시작, 1956년에 우리나라 미술계최초의 미술평론가협회가 발족했다. 창립 멤버는 이경성(李慶成), 최순우(崔淳雨), 김영주(金永周), 김병기(金秉騏) 등이었고 이를 계기로 전문 평론가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이일(李逸), 이구열(李龜烈), 유준상(劉俊相), 박내경(朴來卿) 외 다수가 있다. 이들은 작가가 아닌 순수 평론가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미술평단의 시초를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은 서로 기능을 달리하는 것인 만큼 작가가 평을 쓰는 것은 객관적으로 순리가 아닌 듯하며 각자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일이기에 작가는 창작에 전념해야 하고 평자는 모름지기 역사와 철학, 미학, 그리고 투철한 예술관과 감식안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