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사 탱화제작
중일(中日)전쟁이 일어난 1937년 난데없이 불화(佛畫)제작 주문을 받았다.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驪州郡 金沙面 梨浦里)에 석문사(釋文寺)라는 절을 짓고 있었는데 이 절 주지인 창강 김영진(滄江 金榮鎭) 씨가 내게 탱화(幁畵)를 그려달라고 찾아왔다. 김 씨는 안동 김문(金門)의 저 유명한 삿갓 김병연(金炳淵)의 손자다. 우리 집안과도 세의(世誼)가 있던 분인데 한말에 홍천(洪川) 군수까지 역임했다.
명문의 후예로 젊은 시절에 선비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가문의 불행한 일로 승(僧)이 되어 입산수도 하다가 신원환속(伸冤還俗)하여 말년에 이포에다 사찰을 짓고 중이 되어 절로 돌아왔다. 이에, 중이라는 뜻의 ‘釋(석)’과 선비라는 뜻의 ‘文(문)’을 합하여 절의 이름을 ‘석문사’라고 하고 대웅전(大雄殿)이며 산신각(山神閣) 등 다섯 채의 집을 덩실하게 지었는데 불화가 없어 내게 그려달라고 청한 것이다.
창강 어른의 갑작스런 불화 주문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협전」,「선전」,「후소회전」에 몇 차례 출품은 했지만 도무지 불화라는 건 그려본 일이 없어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그려본 적이 없어 자신이 없다”고 했더니 창강은 염려 말라며 내 손을 잡고 다짜고짜 수원에 가자면서 채비를 하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곳은 다름 아닌 수원 용주사(龍珠寺)였다. 창강은 용주사 강대련(姜大蓮) 주지승에게 내가 이름 있는 화가인 것처럼 소개하고, 단원이 그렸다는 불화를 모사하도록 도와달라고 청했다. 용주사 주지는 그 당시 총독부를 이웃집 다니듯 하던 정치 승(僧)이었다.
용주사에서 4-5일을 묵으면서 이 절의 후불(後佛)탱화, 산신(山神)탱화, 신중(神衆)탱화 등을 모두 모사했다. 모사해온 그림을 토대로 해서 나는 석문사 불화제작을 시작했다. 큰 방 하나를 치우고 난생 처음 탱화를 그리는데, 불화를 그리는 동안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금족령이 내려져 절 밑에는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40일간은 절에서만 기거해야 했다. 밥을 먹을 때도 바리때에 공양을 받아 죽비(竹篦)로 딱딱 쳐야 수저를 들 수 있었다. 밥을 먹은 후에도 반드시 제 손으로 그릇을 말끔히 씻어야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스님이 옆방에서 향을 피워놓고 염불을 했다. 창강은 내가 그림을 그리느라 기운이 빠진다며 매일 인삼을 달여서 한 대접씩 들여보냈다. 불화를 제작하느라고 그럭저럭 절에서 해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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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석문사 불화를 그릴 때 보고 모사한 수원 용주사 후불탱화 / 이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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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1938년) 봄, 점안식(點眼式)이란 이름의 탱화낙성식을 거행했는데 시골학교 운동회보다 더 요란스러웠다. 절 마당에 만국기 같은 것을 달고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생전 처음 그린 불화였지만 온갖 정성을 다해서였던지 호평을 받았다.
식이 끝난 뒤 나에게는 떡, 과일 등을 높이 괸 큰상을 따로 공양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어리둥절해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상을 물리자 창강은 “화가가 받은 상은 남이 손댈 수 없다”며 사람을 시켜 채롱을 가져오라고 해서 차곡차곡 담아 10여 리 밖에 있는 우리 집에 실어 보냈다. 그때는 조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셨는데, “화가 손자 덕에 부처님 상을 받았다”고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불화 때문에 두어 달이나 절에서 산 탓으로 수염이 텁수룩하고 머리가 길어서 집에 내려오자마자 이발부터 했다.
대 신문사 새해 휘호
「협전」과 「선전」에 몇 번 입선하고 후소회도 만들어 단체활동을 하면서 나는 제법 화가대접을 받았다. 어느 날 삼촌(張麟永, 장인영)이 일을 논의하러 찾아왔다. 삼촌은 약종상(藥種商) 허가를 내려고 하는데 경기도청 위생담당 타무라(田村) 경부가 내 그림을 좋아하니 그를 한번 만나서 부탁해 달라고 말했다. 삼촌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서당공부도 함께 해서 항렬만 위였지 친구 같은 사이였다.
나는 아무와도 교제에는 담쌓고 지내는 단순한 성격이어서 매우 난감했다. 그렇다고 아버지 형제인 삼촌의 간곡한 부탁을 외면할 수도 없어 고민하다가, 마침 잘 알고 지내던 당시의 사교가 김상설(金相卨) 씨를 만나 사정을 말하고 지원을 청했다. 김 씨의 주선으로 타무라 경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숙부와 나를 태서관으로 불러내어 김 씨와 타무라, 삼촌과 나, 4자회동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김 씨는 나를 타무라 경부에게 소개하고 약종상 청원자의 조카라고 덧붙였다. 타무라는 약종상에 관한 이야기는 밀어놓고 조선미술과 화가들에 대해서만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서화골동을 좋아하고 우리 화가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타무라는 나에게 깊은 관심을 표시하면서 화실에 놀러오겠다고 말했다. 그림 이야기만 하니까 삼촌은 약종상 걱정 때문에 좌불안석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술도 잘 못하는 터라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김상설 씨도 약종상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딴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자리를 일어서면서 내가 어렵게 입을 열어 “잘 부탁합니다”하고 인사하면서 약종상 허가를 넌지시 환기시켰다. 술값을 치르고 나오면서 남의 일만 해준 것 같아 뒷맛이 개운치 않았지만 얼마 후에 약종상 허가가 나와 삼촌은 서울 도동(桃洞)에서 ‘영인당(永仁堂)’이란 이름으로 개업했다. 이때 중일전쟁이 났으니까 아마 1937년의 일인 것 같다.
그로부터 1년 후엔가 나는 난생 처음 그림 주문을 받았다. 그것도 큰 신문사의 신년휘호였다. 하루는 심산(노수현)이 인력거를 타고 명륜동에 있는 나의 집에 찾아왔다. 그는 망토같이 생긴 외투(임바네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와 인사만 하고 지낼 뿐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신문사에서 쓰려고 하니 신년휘호 한 장 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나 같은 신출내기 화가에게 큰 신문사가 신년휘호를 부탁하는 게 의외일 뿐 아니라 심산이 직접 내 집에까지 찾아온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그는 외투 속에서 납작한 상자를 꺼내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신문사에서 보내는 것이니 받아두라”고 했다. 심산이 돌아간 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화신상회(和信商會)에서 발행하는 5원짜리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그림을 받아가기도 전에 화료(畵料)부터 받은 격이어서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이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구나 하고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때 5원짜리 상품권은 꽤 쓸모가 있었다.
이때부터 심산하고는 가끔 만났다. 심산은 원서동의 보잘 것 없는 조그마한 집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아버님 회갑기념 화첩(畫帖)을 위한 그림을 청하러 갔을 때도 집이 누추하다면서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화첩만 건네주었다. 얼마 후에 화첩에다 <자목련(紫木蓮)>을 정성껏 그려 보내줘서 그때의 고마움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나중에 심산과 나는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