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에 몇 차례 입선하자 내게는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 초여름이었는데, 하루는 막내 숙부의 손위 처남인 김영진(金榮鎭) 씨가 찾아왔다. 김 씨는 강릉에 잘 아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부친 영정을 낸다고 하니 강릉에 가자고 부추겼다.
김 씨는 난봉꾼은 아니지만 좀 헤픈 사람이어서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어찌나 자신 있게 말하는지 바람도 쐴 겸 강릉행 길에 오르기로 했다. 경원선(京元線)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약수로 유명한 삼방협(三防峽)을 지나는데, 깎아지른 듯한 충암절벽에 둘러싸여 있는 골짜기를 뚫고 나가는 맛이 여간 시원하지 않았다.
저녁때쯤 석왕사(釋王寺) 역에 도착,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빽빽이 들어선 개천 길을 따라 한 5리쯤 걸어 올라가 절을 구경하고 절 앞에 있는 금택(金澤)여관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밤새도록 창밖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잠을 설쳤다.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꿈을 꾸고 왕이 되겠다는 해몽(解夢)을 받은 곳이어서 나도 뒤척이며 생각을 해보았다. 불현 듯 “主人夢說客 客夢說主人 今說二夢客 亦是夢中人(*주인몽설객 객몽설주인 금설이몽객 역시몽중인* 주인이 꿈꾼 이야기를 객에게 하니 객이 또한 꿈꾼 이야기를 주인에게 하더라. 이제 꿈 이야기를 한 두 사람이 역시 꿈속의 사람이다)”이라고 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삼몽사(三夢辭)」란 글이 떠올라 그 뜻을 생각하면서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안변(安邊)으로 나와 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을 타고 강릉으로 내려가는데, 왼쪽은 동해의 푸른 물이, 오른쪽은 육지여서 어떤 때는 기차가 바다위로 가는 것 같았다. 동해물이 어찌나 푸른지 하얀 사기대접에 초록 물을 푼 것 같았다. 고저 총석정(庫底 叢石亭)을 지나 소나무가 모래사장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송전(松田) 해수욕장을 거쳐서 기차는 외금강(外金剛) 역에 멎었다. 역 마당이 온통 모래사장이어서인지 승객들이 모두 땅바닥에 털석 주저앉아 있었다.
온정리(溫井里)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외금강 역으로 나왔다. 그때는 기차가 양양까지만 운행하였기 때문에, 양양(襄陽)에 가서 버스를 타고 강릉에 도착했다. 읍에 여관을 정해놓고 김영진 씨가 영정을 내겠다고 한 강릉 근교의 김봉기(金奉起) 씨 집에 찾아갔다. 김 씨는 우리를 후히 대접했지만, 영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거짓말을 한 것처럼 되어버린 김 씨는 안달을 했다. 넌지시 영정이야기를 꺼냈지만 주인은 냉담했다. 나는 속으로 ‘속았구나’ 하고 단념하고, 미끄러진 김에 쉬어가는 식으로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경포대도 가보고 오죽헌(烏竹軒)도 구경했다. 바닷가에 나가 문어를 쪄서 쇠고기처럼 쓱쓱 썰어 파는 것도 맛보고,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놓은 싱싱한 전복도 사먹었다. 여차하면 집에 전보라도 쳐서 여비를 부쳐 받을 셈으로 뱃심을 두둑이 가졌다.
김영진 씨는 추락한 위신을 만회하려고 중추원 참의(參議)로 있는 강릉 최 씨 문중의 거물 최준집(崔準集) 씨와 연결시켰다. 최 씨는 만석꾼 부자인데 우리를 청해서 술상을 내고 두리기둥에 고급목재로 치장해서 으리으리한 신축사당을 구경시켰다.
그는 김영진 씨에게 경성일보 강릉지국장으로 있는 계씨(季氏)인 최위집(崔緯集) 씨를 소개해주었다. 최위집 씨는 시원시원한 사람으로 대뜸 병풍 그림 한 벌을 주문하는 바람에 나는 여관에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마침 ‘장고봉(張鼓峰)사건’(1938년 여름 두만강 하류 만주‧조선‧소련 국경교차점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국경분쟁으로 공방전을 벌인 사건)이 일어나 강릉 시내는 긴장한 분위기였고 여관에도 임검(臨檢)이 심했다.
화가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별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임검 나온 형사가 화가 한 사람이 여관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보고하여 서장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일본인 경찰서장은 초면인데도 우리를 초대해 저녁을 내면서 환대했다. 서장은 얼굴에 깊은 흉터가 있었는데 일로(日露)전쟁 때 받은 선물이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일본인 같지 않은 호남아였다.
최위집 씨도 병풍 그림을 받고는 후한 화대(畵代)를 보내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고 강릉을 떴다. 강릉을 떠나면서 생면부지인 경찰서장의 후의에 답례하는 뜻으로 두방(斗方) 그림 한 점을 선사했더니 그도 버스정류장까지 사람을 보내 ‘촌지’라고 쓴 흰 봉투를 전해주었다.
양양에서 기차를 타고 칠흑 같은 밤에 삼방협을 다시 지나는데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어 시심(詩心)을 돋웠다. 이리하여 어설픈 강릉 여행은 그런대로 몇 가지 재미있는 추억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