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39년 10월 후소회가 제2회전을 열 때 조선일보 지사에 「동양화의 신단계(新段階)」라는 글을 발표했다. 과거 귀족사회에서 화가를 ‘쟁이’ 운운 하는 것도 나쁘지만 화가가 자기 비하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썼다. 이당 선생은 내 초고를 보더니 “환쟁이 이야기는 덮어진 책장과 같은 일인데 새삼스럽게 거론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킬 필요가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셨다.
평소 같으면 선생님 말씀이라 승복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화가들의 위상을 높이는 문제여서 나로서는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양보할 수 없었다. 나의 강력한 주장에 선생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럼, 박영래(朴榮來) 씨와 한번 상의하라”고 권고하셨다.
박영래 씨는 일찍이 인사동 삼거리에서 녹성(綠星) 사진관을 경영했었고, 한때 언론계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 문필에도 조예가 있으며 이당 선생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다. 그때 박씨는 요즘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 같은 경제인 클럽인 ‘조선실업구락부’에서 일하면서 용산에 있는 어느 철공장 일도 보고 있었다.
그를 만나러 태평로 국회사무처 자리에 있던 ‘조선실업구락부’를 찾아갔더니 박 씨는 없고, 친일파 거물인 박춘금(朴春琴)이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친일파로 지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길로 용산 철공장을 찾아가 박영래 씨를 만났다. 박 씨는 내가 집필한 원고를 자세히 살피더니 이것은 ‘시의적절한 얘기’ 라면서 주저 말고 발표하라고 격려까지 하였다. 글줄이나 쓰던 사람이어서인지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내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은 대략 다음과 같다.
‘…돌아보건대 이미 1936년에 낙청헌 화실에 모인 우리 동지들은 은사 김이당(金以堂) 선생 지도 아래서 각각 그 경륜에 따라 일야근고(日夜勤苦)해왔다. 장차 우리 젊은 화학도(畫學徒)들은 발랄한 욕망으로 새 시대를 열어갈 의욕에 불타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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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1939년 10월 조선일보에 기고한 <동양화의 신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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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제4회 「후소회전」 때는 내가 총무를 보았다. 개막 하루 전에 작품을 진열해 놓고 일련번호를 매겨 그 순서대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 전람회의 관례였다. 작품목록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총무는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뿐만 아니라 경찰서의 검열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충이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품 마감일 오후, 나는 화신백화점 화랑에 작품을 반입해서 전시장에 죽 늘어놓고 이당 선생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때는 작품진열도 선생의 재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해가 질 때까지 선생이 나타나지 않아 안절부절이었다. 다른 회원을 시켜 “나오셔서 진열을 봐달라”고 두 번씩이나 요청했지만 백화점 문을 닫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관례에 없는 일이다. 나는 책임자이기도 하고 마음이 급해 부랴부랴 선생님 댁으로 뛰어갔다. 선생은 조금 전에 외출하시고 부재중이었다. 하는 수 없이 터덕터덕 돌아와 회원들과 상의하여 자리를 정해서 그림을 걸고 차례대로 목록을 만들어 인쇄소에 넘기고 집에 돌아갔다.
새벽에 일어나 경찰서의 검열을 받기 위해 전시장에 나갔다. 아직 백화점 개장시간 전이기에 수위에게 말하고 뒷문으로 들어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전시장은 뒤죽박죽이었다. 작품들은 진열한 대로 걸려 있지 않고 이리저리 뒤바뀌어 자기 그림조차 찾기 힘들 정도였다. 화가 치밀었다. 목록을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누군가가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닌가 싶어 기분이 나빴다. 알고 보니 늦은 시간에 선생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시 걸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연유를 모른다. 그 해에는 기념촬영 때도 선생이 불참이어서 선생 사진을 위에다 따로 넣어야 했다. 이 무슨 변고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 이 무렵 내가 「협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연달아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고 「후소회전」에 출품한 작품들도 모두 「장중의 독보」라는 신문기사가 실렸다. 그런데다 화학도로서는 전례 없이 신문지상에 논문까지 발표했으니, 나는 너무 당돌하게 달려 나간 셈이었다.
이런 것이 미움의 동기가 되고 견제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후 「선전」의 특선자 대표 축사날의 해프닝도 연장선상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스승으로서 후학의 성장을 북돋아 주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