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관 이석호(一觀 李碩鎬)와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은 이당 선생 낙청헌에서 함께 공부한 동문들이다.
일관은 안성사람으로 안국동의 단칸 셋방에서 처자와 생활하면서 그림과 글씨를 열심히 익히고 있었다. 나보다는 8세 연장으로 천성이 과묵해 말이 별로 없고 침착한 편이었는데 그림보다는 글씨 재주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배웠는지 유도가 3단이라는 말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지만 본인은 절대로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농담으로 그 실력을 보고 싶다고 하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협전」에 몇 번 입선했고 「선전」에도 출품했지만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유순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사상적 내면은 아주 강하고 철저했던 모양이다. 해방 후 혼란기에 좌(左)‧우(右) 갈등이 심각하여 사람들이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노출할 당시에도, 일관은 별로 자기 속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행적이 묘연해질 때가 있었다.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6.25가 터지기 2개월 전쯤의 어느 날 이른 식전에 그가 내 집에 찾아왔다. 농립모(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그만 손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방에 들어오더니 대뜸 세수할 물을 달라고 청했다. 오랜만에어서 그동안 행적을 물으니 어름어름 대답을 피하면서 가방을 열고 조그만 화첩을 꺼내더니 거기에다 그림을 한 폭 그려달라는 것이다. 이른 시간이기에 아침상을 차려내고, 화첩을 두고 가면 곧 그림을 그려 놓을 테니 다시 한 번 들르라고 했다. 그랬더니 시간이 없다며 당장 그려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상을 물리고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니 황급히 일어서서 휭하니 사라졌다.
나는 적이 의아스러웠다. 그 후 소식이 끊겼고 6.25가 발발하여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던 중 풍변에 그의 소식을 들었다. 인민군이 덕수궁미술관에 있는 미술품들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나무상자에 짐을 꾸리는 현장에 그가 참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후 그가 북한의 공훈예술가로 활동하다가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운보는 나보다 한 살 아래다. 어릴 때 청각(聽覺)을 잃은 운보는 다른 사람의 몇 배로 그림공부에 열심이었다. 재주도 있지만 워낙 열심히 해서 그림도 좋았고 전람회 성적도 두드러졌다. 낙청헌에서 공부할 때, 이당 선생은 장애인이었던 운보를 특히 애지중지하셨다. 「선전」 작품심사 때도 심사참여인 이당 선생이 운보 작품에 대해서는 특별히 신경을 쓰더라는 말을 함께 심사했던 일본인 화가 카토 쇼린(加藤松林)에게서 들었다.
나보다 1년 앞서 추천작가가 된 운보는 그림에만 열심히 아니라 사회활동에도 발이 넓고 적극적이었다. 일관과는 정반대로 성격이 직선적이고 일방적이어서 무슨 일을 할 때나 양보나 타협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저마다 주관을 내세워 좌, 우로 갈려 핏대를 올릴 때 사상이 뭔지 노선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는 곧잘 제 주장이 옳다고 우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 운보는 아주 진보적인 주장을 내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
운보는 해방 전부터 문필가들과 교류가 많았다. 해방 직후 인민당을 만들었던 이여성(李如星), 문학평론가 이원조(李源朝), 시인 임화(林和) 등의 문인들과 가까웠는데 이 사람들은 대개 좌경한 사람들로 6.25 때 모두 월북했다. 1.4후퇴 때 운보는 군산 처가로 피난했다고 하는데 임시수도 부산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9.28수복 후에도 오랜 기간 서울에 오지 않았다.
그 후 늦게 서울에 왔다가 곤경에 처했는데 전 서울시장 김 모씨의 도움으로 무사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천주교 신자가 되어 영세를 받았고, 왕성한 의욕과 적극적인 추진력으로 청주(淸州)에다 큰 저택을 짓고 운향미술관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작고했다.
참고로 운보의 재미있는 일면을 하나 소개하면 진보적인 생각과는 달리 여행을 할 경우 꼭 일진(日辰)을 따져보고 길(吉)한 날을 골라서 떠나고, 먼 외국에 가서도 호텔의 방이나 호수(號數)가 자기 운세와 맞지 않으면 절대로 묵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양말과 하얀 고무신 역시 미술계에서는 재미있는 화젯거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