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의「신문전(新文展)」과 미술계를 돌아보기 위해 동경에 갔었다. 현초(이유태)가 일본에서 공부(帝國美術學校, 제국미술학교)할 무렵이었으니 아마 1938년경이었던 것 같다.
일본의 국가주관 미술전람회는 1907년 「문전(文展:文部省美術展覽會 문부성 미술전람회)」으로 시작, 1919년에 「제전(帝展:帝國美術展覽會 제국 미술전람회)」으로, 1937년에「신문전(新文展:新文部省美術展覽會 신 문부성 미술전람회)」으로, 1946년에 「일전(日展:日本美術展覽會 일본 미술전람회)」으로, 1958년에 「신일전(新日展:新日本美術展覽會 신 일본 미술전람회)」으로, 1969년에 「개조일전(改組日展: 사단법인 日展:일전)」으로 탈바꿈했다.
그 당시 일본에 가려면 서울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거기서 관부(關釜)연락선을 갈아타는 길뿐이었는데 요즘 새마을호나 특급열차에 해당하는 ‘히카리(光、빛)’나 ‘아카츠키(暁、여명)’를 타고 하오 네 시쯤 서울을 떠나면 밤 열한시쯤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는 출찰구로 나가지 않고 구름다리를 타고 직접 부두까지 간다. ‘산바시’라 불리는 잔교(棧橋)는 지붕이 있고 옆은 판자로 막아 긴 골목같이 되어 있는데 여기를 빠져나가려면 형사의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다. 사복차림의 형사가 군데군데 서 있다가 용케도 조선 사람만 붙잡았다. 그때의 여권은 본적지 경찰서장이 발행하는 이른바 도항증(渡航證)이다. 인찰지에 묵지를 대고 여행목적 등을 쓰고 경찰서장의 직인이 찍힌 얄팍한 종이쪽이다.
나도 예외 없이 검색에 걸렸는데 도항증 검사는 무사통과였으나 현초에게 주려고 가방 속에 넣어간 고추장 단지가 말썽이었다. 풀어보라는 것이다. 새지 않도록 신문지로 싸고 또 싸서 풀기조차 힘들었는데 기어코 풀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몇 겹을 풀어나갔는지 신문지에 고추장이 배어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통과시켰다. 당시 일제는 조선청년들의 반항의식을 크게 경계하고 있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가다가 현해탄에서 세찬 풍랑을 만났다. 큰 배가 가랑잎같이 흔들리는데, 시렁에 얹은 짐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파김치가 되어 화장실 내왕도 기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 나는 다행히 뱃멀미를 하지 않아 견딜 만 했지만 승객들은 선원이 나누어준 대야를 하나씩 들고 구토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전 여섯 시쯤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 기차 편으로 동경까지 가는데 기차 속에도 이동형사가 타고 있어 조선 사람들만을 일일이 검색했다. 그래도 일본 본토의 경찰은 비교적 친절한 편이었다.
기차가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났는데, 내 옆 빈자리에 어떤 중년남자가 앉더니 아주 나직한 말소리로 여행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이동형사였다. 두말 않고 예의 도항증을 보여주었더니 매우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나의 직업이 화가라는 데 안심한 듯 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재미있는 여행이 되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 당시에도 일본사람들은 미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매우 높았다.
동경에 도착하니 현초가 역까지 나와 반갑게 만났다. 그때 현초는 동경교외 무사시노(武藏野) 근처 이노가시라(井之頭) 공원 옆 한 촌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아주 소박하고 조용한 집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며칠 동안 현초와 한방에 묵으면서 전철을 타고 동경시내를 드나들었다. 관심의 대상인 미술관, 박물관은 물론이고 번화가 긴자(銀座)와 신주쿠(新宿), 칸다(神田) 등 동경의 중심가를 밤낮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신주쿠의 어느 맥주집에서 독일맥주를 마시며 일찍 개화한 일본의 국제 감각에 놀라워했다. 그때만 해도 외국산 술을 파는 술집은 동경에도 흔하지 않을 때다. 서울 생활에만 길들여진 나에게는 한발 앞선 일본의 신사조(新思潮)에 놀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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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년 일본 미술계를 돌아보기 위해 동경에 갔다가 쌍폭포 하쿠운다기 게곤다기에 들렀다 / 왼쪽부터 정종여, 김기창, 이유태, 필자, 김은호, 호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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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우에노(上野)미술관은 히비야(日比谷)공원 안에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초라한 편이었다. 그러나 넓은 공간에 엄청난 대작들로 꽉 채운 전시장, 질서정연한 회장 분위기는 역시 그들이 자랑하는 대일본 제국 미술전람회임을 실감케 했다. 그 당시 일본화단의 기성세대 작가의 작품들은 매너리즘(Mannerism)을 답보하고 있는 듯했고, 신진작가들의 활기찬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일본화부의 몇몇 여류작가의 인물화에 시선이 쏠렸다. 히로다(廣田), 아키노(秋野) 등의 인물화 작품인데 서 있는 두 여인을 그린 히로다의 그림은 구도와 데생과 설채가 눈부실 정도로 정확하고 현란했으며, 아키노의 작품 <양(陽)>도 의자에 앉아 있는 남성을 그린 것인데 인물의 배치와 배경이 파격적이고 햇빛을 받은 음영처리가 돋보였다.
극사실이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양화적인 기법을 구사하면서도 일본화의 특징을 유감없이 살려낸 이 그림들의 신선한 현대적 감각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꾸준히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정치‧경제를 위시하여 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아시아의 선발주자로 한참 발돋움하는 때이기에 물오른 일본미술계는 걷잡을 수 없는 마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거의 매일 같이 전람회를 보러 다니던 어느 날 전람회장에서 이당 선생과 운보, 청계를 만났다. 우리는 그 다음날 관광명소인 닛코(日光)에 가기로 약속하였고, 예정대로 재일교포인 호정환(扈定煥) 씨의 안내를 받아 닛코에 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멀리 폭포 햐쿠운다키(白雲瀧, 백운폭포, 백운룡), 게곤노다키(華嚴瀧, 화엄폭포, 화엄룡)를 바라보고 다시 계곡 위를 건너 주젠지(中禪寺) 호반에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옆으로 뚫린 통로로 나가니 그 앞이 바로 용소였다. 귀가 멍멍하게 떨어지는 폭포소리와 안개를 일구는 물보라! 장관이요 절경이다. 거센 물줄기를 경계짓는 목조 난간에는 ‘잠깐 기다리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의 젊은 낭만파 세대들 가운데는 이런저런 이유로 극도로 센치해 져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절경 앞에 와서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것을 막기 위해 경찰에서 그런 팻말을 세웠다고 한다.
그 다음날 우리는 당시 일본화의 대가이자 「제전」의 심사위원을 지낸 야자와 겐게츠(矢澤弦月) 씨를 찾아갔다. 그는 작품제작 중이었던지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아주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주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신의 지론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견해를 듣고 싶어 했다. 상류층 일본인들에게는 민족차별과 같은 감정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 무렵 한국 미술계도 서서히 신조류(新潮流)가 태동하고 있었다. 「협전」과 「선전」을 중심으로 대작을 출품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외래사조도 빠른 속도로 전달되면서 일부 점은 작가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보였다. 제작 테마도 미인화에서 여인상으로, 산수화에서 풍경화로 신, 구세대의 격차가 점차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나는 「협전」에는 화조그림, 「선전」에는 주로 인물그림을 출품했는데 무리에 가까울 정도로 대작을 냈다.
이때「선전」에는 일본인 화가들과 신예 한국인 몇 사람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서울에 살면서 미술계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본인 화가는 동양화의 카토 쇼린(加藤松林), 카타야마 단(堅山坦)과 서양화의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야마구치 나가오(山口長男) 등이다.
이들은 비교적 고자세여서 한국화가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나 동양화의 카토는 「선전」회장 같은 데서 만나면 매우 친절하게 대했고 서양화의 야마다와 야마구치는 도상봉, 김환기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밖에 한국 도자기를 연구하는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는 도상봉과 교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