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이웃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어 근대미술의 교류가 매우 활발한 편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 학자와 예술가들은 이미 청조 말부터 왕래하여 중국의 상류층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고 일본과는 한‧일합방 뒤 민족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지만 1920년대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피동적인 입장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근대화에 한발 앞선 일본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문화사업을 벌여 1922년 제1회 「선전」이 열릴 무렵에는 당시 한국의 대표급 원로 서화인들을 대거 참여시켰다. 그 당시 의욕적인 젊은 화가들은 중국이든 일본이든 상관없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 우리가 가장 주목했던 화가는 중국의 오창석(吳昌碩)과 제백석(齊白石) 그리고 일본의 타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 등 네 사람이었다.
오창석은 이미 80대의 고령이었지만 패기 넘치는 작품을 계속 제작했고 그의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떨치고 있었다. 전통양식을 뒤엎는 세찬 선과 현란한 채묵을 구사해 쏟아내는 신선한 작품세계는 현대미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회화뿐 아니라 전각(篆刻)의 도법장법(刀法章法)이 입신의 경지여서 구태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자극을 안겨주었으며 동경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제백석(치바이스)은 청 말과 민국에 걸쳐 중국화단의 우뚝한 거목이다. 오창석과 연령차는 있으나 나란히 쌍벽을 이룬 중국화의 큰 스승이었다. 그의 예술은 오창석과는 달리 수묵 중심의 소박한 필치로 풍자와 은유가 담긴 화조 어해(魚蟹)를 즐겨 그려 구수한 서민적인 정취를 풍겼고, 97세의 장수를 누리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공산정권 때는 동향관계인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 주석의 특별한 예우를 받아 만년에 부귀를 누리기도 했다.
일본의 타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와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은 만년에 예술과 명성을 겸비한 일본 화단의 양대 거목이다. 타케우치는 관서(關西, 칸사이), 요코야마는 관동(關東, 칸토) 화파의 영수로 군림, 파벌이 형성되어 동경을 거점으로 한 관동파와 경도를 중심으로 한 관서파, 이 두 세력이 대립적인 위치에서 제국미술원(帝國美術院)을 둘러싸고 쟁패와 알력을 계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요코야마와 타케우치, 두 거목 모두 「제전」의 심사위원급 중진화가들을 제자로 거느려 그 세력은 막강했다.
그들의 예술적 특징을 살펴보면 타케우치는 북종화적 골격 위에 현대감각이 빛나는 참신한 구도와 세련된 필치가 가히 독창적인 경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 화단의 일반적인 경향은 일본화 특유의 생경한 구도와 변화 없는 선, 서양화적인 진채를 사용하는 사실 위주였는데 반해 타케우치의 작품에서는 간명직절(簡明直截), 즉 군더더기가 없는 명쾌한 표현으로 자연에 접근하는 방식이어서 신세대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요코야마는 수묵 위주의 산수풍경을 즐겨 그렸는데 남화풍의 산수화도 아니고 일본식 신남화도 아닌 독창적인 풍경화였다. 수묵이 번져서 운연(雲烟) 경계를 이루는 식의 그의 작품은 신중하고 근엄한, 그리고 품격 있는 화경을 펼쳐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그러나 일반 관람자들과 신경향을 따르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한 것 같다.
1933~4년경, 당시 문화예술계의 새로운 정보를 얻기에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쉬웠고, 일본 화단의 소식에 더 익숙했다. 이때 서울에까지 전해진 일본의 문화계 일화 한 토막을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1937년에 일본정부에서는 문화예술계의 공로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장르별로 각 분야에 한 명씩 주기로 되어 있는 이 문화훈장은 천황(天皇)이 내리는 최고 상훈이어서 그 권위와 비중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 해의 수훈자로 관서파의 영수인 타케우치 세이호가 선정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관동파의 요코야마 다이칸이 크게 낭패하여 이를 뒤집기 위해 맹렬한 활동을 벌였다 한다.
관동파는 수도 동경의 맹주로서 관서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명분과 타케우치에게 최고영예를 양보할 수 없다는 요코야마의 개인적 이유가 배수진이었던 것 같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부 쪽에서는 크게 당황했고 진퇴양난에 빠진 당국은 궁여지책으로 미술계에서만 2인의 수훈자를 내기로 결정해 타케우치와 요코야마 두 사람이 나란히 훈장을 받는 기현상을 빚었다고 한다. 이것은 공공연한 비화요, 그 당시 일본화단의 세력다툼의 일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