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위창 오세창(吳世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가친의 회갑 기념화첩을 만들 때였으니까 1942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위창 선생은 익선동 옆, 지금은 없어진 수은동(授恩洞)에 살고 계셨다. 전형적인 조선집인데 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거쳐 중문(中問)에서 안채와 사랑채로 갈라지는 구조였다. 사랑채는 일각대문을 또 한 번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위창 선생이 기거하는 사랑채에 들어가 큰 절을 하고 “그림 공부하는 아무개인데 아버님 화갑(華甲)을 맞아 화첩을 만들어드리려고 하니 글씨 한 폭 써주십사”하고 정중히 부탹을 드렸다. 위창 선생은 나에게 “월전 화백이 어른을 위하는 일인데 내가 하나 해드리지”하고는 흔쾌히 화첩을 받아들었다. 그 어른은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선전>에서 특선을 하고 최고상까지 받은 걸 알고 계셨다. 키가 크고 몸이 수척하니 위엄이 있는 분이셨다.
위창 선생은 1886년에 박문국(博文局) 주사로 한성주보(漢城週報)기자를 겸하고 농상부 참의(農商部 參議) 체신국장 등도 역임했다.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다가 돌아와 천도교에 입교하여 만세보(萬歲報), 대한민보 사장으로 일하였고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분연히 일어서는 등 개화운동에도 공이 많았다.
선생은 서화, 전각의 감식과 보학(譜學)에 조예가 깊었다.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전각에도 뛰어난 대가였다. 당대의 서화가들이 다투어 선생의 전각을 받고자 한 것은 그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1982년에 간행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그의 선친 역매가 수집한 우리나라 서화가의 사적을 선생이 직접 보완하여 엮은 ‘서화인명전’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선생은 우리나라 고미술품의 감식안이 높아 간송미술관을 세운 전형필 씨가 서화골동을 수집할 때 자문역을 맡아 우리 미술품의 해외유출을 막은 공로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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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창 오세창(사진 왼쪽)과 간송 전형필 / 문자향서권기-위창 오세창 [사진출처 : 간송미술문화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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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에 다시 찾아갔더니 선생은 가친의 아호인 일재(一齋)에 옹형(翁兄)을 붙여 존대하고 ‘六十一壽祝’이란 방서(傍書)를 달아 ‘삼다구여(三多九如)’라고 써주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는 79세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시골집에 있던 중국의 명가 동기창(董其昌)의 대자횡축(大字橫軸) 글씨를 가지고 진가를 가리기 위해 선생 댁을 다시 찾았다. 그 글씨는 중국의 명필 동기창의 천마부(天馬賦)인데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것으로 글자 한 자가 주먹만큼씩 큰 대작이다.
선생은 글씨 축을 펴보더니 대뜸 “이거 팔거여?” 하고 물었다. 선생의 눈치로 봐서 좋은 물건인 듯싶었다. 애당초 팔 예정이 아니어서 나는 “팔 건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대종백인(大宗伯印)’, 기창(其昌)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힌 전폭을 끝까지 살펴본 선생은 “글씨는 좋군” 하고 뜸을 들이더니 “진짜다, 가짜다를 내가 어찌 말할 수 있나?” 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내 속단일지 모르나 그 분의 태도로 보아 자기에게 넘겨주었으면 하는 바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무슨 묘한 인연인가......
몇 해 뒤 선생은 작고하시고 그의 선친 역매 오경석(吳慶錫) 공이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선물로 받아온 동심 금농(冬心 金農)의 ‘매화’그림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동심은 팔대산인(八大山人), 정판교(鄭板橋), 나양봉(羅兩峰)과 함께 양주팔괴(楊州八怪)의 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매화에는 일인자로 꼽히던 명가였다.
동심의 그림에는 장지동(張之洞), 오대징(吳大徵) 같은 당대의 명인들이 쓴 제발(題跋)이 붙어 있고 역매에게 증정한다는 쌍관까지 있다. 제발을 쓴 장지동은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이고, 오대징은 당대의 서화대가였으니 역매의 비중이 높았음을 짐작할 만하다.
역매의 호는 진재(鎭齋)고 당호는 천죽재(天竹齋)이다. 본시 역관(譯官)이어서 외국 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 지추(知樞)의 벼슬로 연경(燃京)에 가서 원ㆍ명 이래의 서화 100여 점을 구해온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삼대(三代), 진한(秦漢)의 금석(金石), 진당(晉唐)의 비판(碑版)도 수백 종을 구해왔다. 역매는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으며 산수화에도 능했다. 그가 펴낸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은 금석학 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