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수상 답사하던 날 (25회)

나는 1941년 20회 <선전>부터 1944년 23회까지 연 4회 특선으로 44년에 추천작가가 되었다. 20회에는 ‘푸른 전복(戰服)’으로 차석상인 총독상을, 21회에는 ‘청춘일기(靑春日記)’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22회에는 ‘화실(畵室)’로 또 한 번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마지막이 된 1944년 23회 선전에는 ‘기(祈)’를 출품했는데 이 작품이 특선에 올랐다. 이로써 연 4회 특선자는 추천작가가 된다는 선전 내규 2조 1항에 의해 1944년 선전이 열린 직후에 추천작가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추천작가가 된 작품 ‘기(祈)’에는 얽힌 사연이 있어 간단히 경위를 적어본다. 이 작품은 고향 여주에 내려가 있을 때 제작한 것이다. 이때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긴박한 시기로 지방에서는 징용이나 보국대에 마구 끌려갈 위기에 몰려있어 너나없이 극도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제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던 그 무렵, 나는 이 난국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 끝에 ‘기’라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신의 가호로 우리 한민족이 안전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충정을 담아서 세 사람의 한복차림 여성이 신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이 선전에서 특선이 되고 이어 추천작가 통보를 받았을 때 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고, 이 작품을 개성 호수돈 여학교에 기증하자는 친구 유달영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43년 22회 선전 때는 내가 수상자 대표로 답사를 하였다. 전람회가 종반에 가까울 무렵 주관자인 총독부 사회교육과로부터 출두통지서를 받았다. 지정한 시간에 가보니 수상자 대표로 답사를 하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수상자 답사는 일본인이 해왔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내게 그것을 부탁했다. 의아해서 우선 사양했더니 담당자는 기어코 내가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일본말로 서툴고 그런 자리에서 답사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으나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승낙했다. 답사원고를 써놓고 전당포에 가서 모닝코트를 빌렸다. 그 당시 답사자는 모닝코트를 입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춰 식장에 들어섰더니 뜻밖에 한 달 이상 전주에 가 있던 이당 선생이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리의 수상식을 보기 위하여 일부러 올라온 모양이구나 생각되어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얼른 그 앞에 가서 “언제 올라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의아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당해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바로 내 자리에 와 앉았다. 정무총감의 상금과 상장 수여식이 끝나고 답사 차례가 되어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모처럼 입어보는 모닝코트여서 어색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식이 끝난 뒤, 그 해 총독상 수상자로 참석한 현초와 함께 복도를 내려오는데 이당 선생이 앞서 내려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다시 한 번 인사드렸지만 대꾸 없이 휑하니 가버렸다. 나는 모닝코트를 입은 채 돌아다니기 거북하여 혜화동 화실로 직행했고 현초는 이당 댁으로 따라갔다.

▲ 현초 이유태 (이화여대 교수 시절이다 -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현초와 나는 이당 선생 문하와 한 화실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

화실로 돌아온 현초는 선생이 이만저만 화가 난 게 아니라고 전했다. “답사를 하려면 의논해서 할 일이지, 제가 뭐 잘났다고 제멋대로 하느냐”고 노발대발하더라는 것이었다. 비로소 연유를 알게 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제 밤에 전주에서 올라왔다면서 언제 의논할 겨를이 있었으며, 또 그런 것을 일일이 의논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되어 몹시 불쾌했다.

이 일 때문에 나는 선생 댁 사랑방 이묵헌에서 들려오는 장대 같은 욕설을 감당해야 했다. 전주에서 올라온 유당(김희순), 심향(박승무), 소정(변관식)이 한 자리에 앉아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험담하는 소리도 계속 들여왔다.

나는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당 선생 댁에 잘 가지 않았다. 사제지간이란 정과 의리와 사랑으로 맺어지는 것인데, 내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어째서 이렇게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협전>과 <선전>에서 두각을 드러내자 주변의 시기질투를 감내해야 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폐를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