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광고만 하면 쉽게 모델을 구할 수 있지만 내가 <선전>에 출품할 때만 해도 모델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양화는 누드가 아닌 코스튬인데도 사람들은 모델이 되기를 꺼렸다. 그래서 그 당시 여성모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권번(券番)에 출입하는 기녀밖에 없었다.
1937년 16회 <선전>에 출품한 ‘승무도(僧舞圖)’를 그릴 때도 승무할 줄 아는 사람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마침 발이 넓고 사교적인 무허 정해창(無虛 鄭海昌)에게 부탁해서 승무를 할 줄 아는 기녀를 찾았다.
무허는 현초의 고종형인데 나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중국 옥새를 각(刻)한 성재(김태석)의 제자로 서예와 전각에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자기 집인 종로4가 원제약방(한약 건재상) 2층 자택에 사무실을 차리고 거기서 글도 쓰고 전각도 했다.
무허는 흔히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종로통을 지나 화신 앞, 남대문을 거쳐 명동의 다방거리를 산책하는 한량이었다. 그의 단골 다방은 소공동 입구의 낙랑다방과 명치정(지금의 명동)에 있던 성림(聖林), 백룡(白龍)다방 등이었다.
간혹 현초와 함께 그의 사무실에 놀러 가면 원두커피를 손수 끓여 내놓고 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서양화가 박상진과 단짝이었는데 다방이고 요정이고 바늘에 실처럼 붙어 다니면서 놀았다.
20회 <선전>에서 총독상을 받은 작품 ‘푸른 전복’을 그릴 때도 무허의 배려로 어린 기녀를 모델로 썼다. 명륜동 4가에 있던 일본인 하숙 광명관(光明館) 2층 8조 다다미방을 쓸 때였다. 이때는 모델은 물론 소품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한복 입은 여성이 전복을 입고, 벙거지를 쓰고, 부채를 펴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인데 벙거지 구하기가 꽤나 힘들었다.
신문에 특선 발표가 나던 날, 모델 해준 여성이 일부러 찾아와 나보다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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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전복 (1941년), 192*143 / 조선 권번에 소속된 기녀 민산홍을 모델로 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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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 선생이 1939년 남원에 있는 춘향 사당에 모실 춘향의 초상을 그릴 때도 조선 권번에 나가던 소녀기(小女妓)를 모델로 삼았다. 그 소녀는 국악원장을 역임한 함화진(咸和鎭) 씨 소실의 딸이어서 뼈대도 있었고, 가야금 솜씨도 좋았다.
이 무렵은 서양화가들도 모델 구하기가 힘들어 애인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같은 얼굴을 그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가 22회 <선전>에서 특선, 창덕공상을 받은 ‘화실(畵室)’은 집사람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