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운 김용진(嶺雲 金容鎭) 선생을 안 것은 내가 <선전>에 한두 번 입선한 병아리 화가 시절이니까 1930년대 중반이었다. 영운 선생은 고종 때 영상(領相)을 지낸 영어 김병국(穎漁 金炳國)공의 손자이며 인격과 학식을 겸비한 당대의 멋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항상 연옥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삐뚜름하게 쓰고 다녔는데,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친절했다.
그는 미국 대사관 테니스클럽의 회원이기도 했고 사교의 폭도 넓었다. 내가 아버님 회갑기념 화첩에 그림을 받기 위해 선생 댁에 찾아갈 무렵 그 어른은 지금의 서울 익선동에 있는 요정 오진암(梧珍庵) 자리에 살고 있었다.
전통 한옥인 사랑채에 기거했는데 높은 축대 위에 넓은 대청과 방안에는 문방제구가 정연하게 갖춰져 있고, 고서화와 고서적이 가지런해 정리되어 있어서 한눈에 격조 있는 사대부 집안임을 느낄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은장식 담배함과 재떨이, 재판 위에 장죽이 놓여 있었으나 별로 사용하는 것 같지 않고 늘 궐련을 피워 물었다.
권부(權府)를 누리는 노년들의 거드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첩을 받으러 갔을 때도 “참 오랜만이오. 어서 앉으시오” 하고 경어를 써서 도리어 송구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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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운 김용진(嶺雲 金容鎭, 1882-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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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일찍이 중국의 유명한 서화가 방명(方洺)에게 그림 공부를 했으며 만년에는 특히 중국의 명가 오창석(吳昌碩)의 그림에 심취하여 화풍이 오 씨와 많이 닮아 있다. 영운 선생은 나의 화(畵)와 서(書)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앞으로 우리나라 서화계를 위해 노력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창석 화훼 12정(花卉十二幀)’이라는 책 두 권과 상아(象牙)촉에 정교한 글씨를 새긴 중국의 옛날 붓 한 자루를 주면서 ‘마음의 징표’라고 말씀 하셔서 감격했던 적이 있다. 화훼12정 표지에 ‘갑오춘 구룡산인 근중(甲午春 九龍山人 謹贈)’이라 적은 위에 낙관까지 찍어주었는데, 이것은 내 일생의 귀중한 기념물이다.
어느 해인가 미군대사가 몇 사람의 동영화가들을 만찬에 초청한 일이 있었다. 소정(변관식), 제당(배렴) 등 화가 10여명이 한식 구조로 된 대사관저에서 저녁 대접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 영운 선생도 초대되어 서투르지만 영어로 대화를 해서 눈길을 끌었다.
영운 선생은 한때 서울미대에 초청강사로 출강하기도 했고, 문기 넘치는 많은 문인화 족적을 남겼다. 영운 선생은 말년에 운니동의 자그마한 한옥에서 작은 마나님과 함께 살다가 망구(望九)의 연세로 별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