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도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소년시절부터 인물초상에 관심이 있었고 우연히 엣 명인의 초상화를 접할 기회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초상화 공부에 힘을 기울인 것 같다. 이러한 연유 때문인지 후일 나는 우리나라 역사상의 위인(偉人), 명인(名人)의 영정을 많이 그렸다. 숫자로 계산한다면 우리나라 초상화 사상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린 것 같다.
외사리의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이천 도립리(利川 道立里) 마을에 엄낙암(嚴樂庵)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그 분은 나의 조부와 같은 금계 이근원(錦溪 李根元) 선생 문하의 학자였다. 이 댁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생 영정을 모시고 있어서 1년에 한번 씩 공개했다. 영정을 공개하는 날엔 잔치를 베풀고 선비들이 모여서 공람(共覽) 했다.
이 행사를 ‘영정봉심(影幀奉審)'이라고 했는데, 조부께서 꼭 이 자리에 참석하셨다. 이 행사는 대학자인 우암 선생의 뜻을 기리고 업적을 숭모하는 의미도 있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선비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세미나와 같았고, 1년 내내 장안에만 넣어두었던 영정을 꺼내서 빛을 보이고 바람을 쐬는 일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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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89)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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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부를 따라 엄낙암 선비 댁에 갔는데 그곳에서 분홍 두루마기를 입고 댕기꼬리를 늘어뜨린, 노년까지 친구로 지낸 동창 원충희(東凔 元忠喜)를 처음 만났다. 동창은 서예도 잘했을 뿐만 아니라 서화골동품 감식자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그때 내가 7, 8세 정도였으니까 동창도 나와 같은 또래의 동자였을 것이다. 그의 조부 원두릉(元斗陵)도 조부와 같은 금계문인(錦溪文人)이어서 영정봉심회에 참석했고 동창도 그의 조부를 따라 온 것이다.
나는 동창과 동무가 되어 놀면서 영정봉성 행사를 눈 여겨 보았다. 우암의 초상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그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선전>에 입선하고 집안 어른들의 영정도 그릴 무렵 뜻밖의 초상화 제작 제의가 들어왔다. 조금 당황했지만 흥미도 없지 않아 수락했다.
나에게 최초의 초상화 제작을 부탁한 분은 한문학자 권오돈(權五惇.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의 선친인 낙재 권영우(樂齋 權寧禹) 씨이다. 그 분은 전간재(田艮齋) 문인으로 일대에서는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던 권 씨가 사람을 보내 영정제작을 의뢰해서 집에서 30리 거리의 점동면(點東面)에 있는 그 댁에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렇게 해서 제작한 영정은 의외로 성공적이었으며 그 영정은 아들인 권오돈이 모시고 있다가 지금은 장손인 권영에게 물려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