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중국 비행기가 폭격할 우려가 있다는 구실로 서울 사람들을 연고지에 소개(疎開)시켰다. 나는 고향(여주군 홍천면 외사리)으로 가지 않고 여주읍으로 내려갔다. 그때가 1943년 10월이었다.
향리로 가지 않고 읍에 자리를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한국인에게 강제 징용령이 발동되어 영장만 받으면 무조건 끌려가게 되어 있었고, 군대에 데려갈 나이가 넘은 사람이면 보국대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로 징집했다. 징용대상자였던 나는 시골에 가 있다가는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기관들이 모여 있는 읍에서 활동할 생각으로 여주읍의 상황을 살피기 위애 이천읍에 사는 발이 넓은 친구 이종재(李宗載)를 찾아갔다. 지방의 유지인 이 씨는 서슴없이 수원지방법원 여주지청의 일본인 판사 후지(鯸井)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후지 판사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붙이는 보랏빛 배지가 달린 국민복을 입고 있었다. 이 씨가 써준 소개장을 보였더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줬다. 판사는 동경제대 법학부출신으로 고문에 패스한 후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나와 비슷한 나이인 30대 초반이었는데 첫눈에 봐도 신사다운 면모를 풍겼다.
판사는 부인과 어린 딸 등 3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나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까지 내면서 내가 여주읍에서 기거할 집을 얻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후지 판사는 여주경찰서 사법주임으로 있다가 양주경찰서로 전근 간 한국인 김도원 경부를 소개해줬다. 김 경부는 여주읍에서 마암족으로 가는 강변도로 옆 유선대에 조그만 집을 한 채 가지고 있는데, 전근 가면서 관리인에게 맡겨놓고 갔으니 그 집을 빌리면 좋을 거라고 알려줬다.
그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언덕 위에 파란 페인트를 칠한, 제비집처럼 아담하고 한적한 집이 강을 향해 있었다. 방에 앉아서도 바로 밑으로 흐르는 여강을 바라볼 수 있어 첫눈에 마음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방인 온돌방 하나, 다다미방 하나, 마루방, 현관, 변소가 달린 규모 있는 집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자전거를 빌려 타고 의정부로 달려가서 김도원 경부를 만났다. 김 경부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집이 마음에 드니 세를 놓으라고 사정했다. 김 경부는 내 친구인 이종재하고도 가까이 지내는 터였다. 그는 세고 뭐고 마음대로 하라고 흔쾌히 승낙했다.
집을 간단히 손보고 나서 얼마 후에 이사를 했다. 따로 떨어진 외딴집이어서 좀 쓸쓸한 게 흠이었지만 바로 위 언덕 위에 비행기 감시초소가 있어서 청년들이 교대로 망을 보기 때문에 오히려 든든했다. 나는 이 집에서 마지막 <선전(1944년 23회)> 출품작 ‘기(祈)’를 그렸다.
이웃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왔다고 호기심을 가지고 대했다. 나도 지방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입장이어서 그들과 접촉하면서 저변을 넓혀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당 댁에서 종종 만났던 입산 강찬수(立山 姜振秀) 씨가 여주군수로 있었다. 내가 여주로 이사 왔다니까 퍽 반기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강 군수와 친하게 지내다보니 자연 경찰서장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당시 여주경찰서장은 쿠사노(草野)라는 일본인이었는데, 내가 화가이기 때문에 경찰서장으로서도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지 허물없는 친구로 바둑도 두고 농담도 교환하게 되었다. 술이 귀한 때였지만 그에게는 술 배급이 나왔고, 저녁시간 서장관사에서 바둑을 둘 때면 우리는 으레 따끈한 정종 잔을 나누었다.
나의 복이었는지, 화가의 이름 덕이었는지는 몰라도 전쟁통의 어려운 시기를 여주에서 별 어려움 없이 넘겼다. 그 중에서도 여주경찰서 아리무라(有村) 경무주임은 꽤 고맙게 대했다. 쿠사노 서장은 천상 약삭빠른 일본사람이었지만, 아리무라는 그렇지가 않았다. 경찰이라기보다는 그저 순진한 시민이고 허물없는 친구 같았다.
아리무라 역시 바둑친구였는데, 그림을 좋아해서 나에게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묻곤 했다. 자녀가 없어 내외간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밤늦도록 바둑을 두면서 세상 이야기, 생활문제 들을 이야기 하다가 은근히 나의 생계를 걱정해주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바둑을 두면서 슬며시 우리집 식량사정을 묻기에 어물어물했더니 내일 저녁에 사람을 보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은밀하게 식량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때는 너나없이 굶주리고 있을 때여서 그 우정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뿐이 아니다. 여느 때처럼 그와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지나간 이야기지만 장 선생에게도 보국대(報國隊) 영장이 나왔더군요” 하고 말머리를 꺼냈다. 이어서 “읍사무소에서 징집자 명단이 올라왔는데 내가 보기에 몸이 약해서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지워버렸지요” 하고는 바둑돌을 놓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징용보국대 영장!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종잇장을 받고 울며불며 사지(死地)로 끌려가야 하는 그 영장을 건강을 염려해서 지워버렸다니, 그것은 단순한 고마움이 아니라 은혜다.
아리무라는 이민족이고 권한을 가진 경찰이다. 이 사람 봇 끝에 사활이 걸려 있는 이 판국에...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진실로 격한 감개를 느껴 바둑돌을 놓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랬더니 그는 도리어 겸연쩍은 듯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지금도 그 고마움은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여주에 살면서 성천 유달영(星泉 柳達永)을 만났다. 그때 성천은 여주군청에 촉탁으로 근무했다. 그도 역시 피신처를 찾아온 것이다. 성천은 조용히 만나면 “장형! 이 고비를 잘 넘깁시다. 우래 가지 못할 겁니다”라고 격려했다.
나는 여주에 살면서 두 가지 무모한 짓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머리를 짧게 깎지 않고, 각반(脚絆)도 하지 않았다. 이때 이발소에는 머리를 길게 깎아주지 못하도록 엄한 지시가 내려져 있었는데, 나는 머리를 박박 깎기가 싫어서 이발소에 잘 가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1년 내내 머리를 깎지 않고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어쩌다 이발소를 가면 꾀를 부렸다. 이발소 의자에 앉으면 주인이 바리깡을 들고 주저주저했다. 나는 말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 이발사가 아무 말 않고 길게 깎아주었다. 이발사도 내가 이곳 권력 층과 친하게 지내는 걸 알아차리고 그렇게 한 것 같다.
그 당시는 짧게 깎은 마루가리와 국민복 착용이 의무적이었는데, 나 말고도 한 사람, ‘여주의 무법자’가 있었다. 평안도 사람으로 여주에 와서 공의(公醫)를 하고 있는 옥경석 씨가 그 사람이다. 성격이 둥실둥실한 호인인데도 머리 깎기는 사뭇 싫어했다. 그래서 옥 공의와 나는 머리를 깎지 않는 사람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무렵 일제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국민생활에 규제를 가해 각반만 안 쳐도 차를 못 타게 했다. 당시 여주에서 수원까지 다니는 기차가 있었고 또 서울을 내왕하는 여주-서울 간 시외버스도 있어서 그런대로 다닐 만 했는데 여주역과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각반을 치지 않은 사람은 차를 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서울에라도 한번 나가려면 각반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나는 각반을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걸 차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양복바지를 한복대님 매듯이 접고는 그 위로 양말을 올려 신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까짓 각반을 찬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는지 모르겠다.
여주생황의 막바지에 나는 쿠사노 서장을 찾아온 일본인 화가 가토 쇼우린에게서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어 지금까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아 있다.
<선전>의 심사참여를 역임한 가토 쇼우린은 서울 남촌의 대화정(大和町)아래 윗집에 살던 경찰서장 쿠사노를 찾아와 그림을 팔기 위해 여관에서 여러 날 묵었는데 쿠사노 서장이 가토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고 나를 초대하여 함께 저녁을 들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다음 날 화첩 그림도 받을 겸 가토 쇼우린이 묵고 있는 여관에 찾아가서 이야기 하던 중 지난 날 <선전> 작품 심사과정에서 나의 작품에 대한 이당 선생의 감정적인 처사에 얽힌 서운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쾌하지 못한 후일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