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 1년 전인 1944년에 평양구경을 했다. 여주사람으로 평양의 대동(大同 )고무회사 전무이사로 있던 전은태(田殷台) 씨의 초청을 받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평양에 간 것이다.
경의선을 타고 평양에 갔는데, 기차가 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정사복 경찰관의 헌병이 나와 갑자기 삼엄한 경계를 펴고 일반 승객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 웬일인가 싶어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더니 뒷머리가 하얗게 드러난 신군복 차림의 노신사가 호위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승객 중의 누군가가 ‘이다가키 세이시라(조선군사령관)’라고 말했다.
출찰구에 나갔더니 전은태(田殷台)전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평양여행에서 좋은 친구를 여럿 사귀었고 오랜만에 옛 친구 의사 두 사람을 만났다. 이천도립병원장을 지낸 조진석(趙震錫) 박사가 평양에서 외과의원을 개업하고 있었고, 배영설(裵永卨)박사가 소아과 의원을 차리고 있었다.
조 박사가 이천의 도립병원장으로 있을 때 시골에 살던 내 셋째 매부가 복막염으로 위독하여 도립병원에 입원해서 조 박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은 일이 있어 나와는 구면이었다. 그는 평양에서 나를 만나 감개무량하다면서 환대했다.
조 박사는 나를 집으로 초대해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그 위에 냉면을 올려서 냉면을 뽑았는데 처음 보는 냉면들이 신기했고 맛도 훌륭했다. 평양사람들은 웬만한 가정이면 모두 냉면틀을 갖춰놓고 즉석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배영설 씨는 평양사람으로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소아과 의원을 열고 있었다. 그 집에도 초대를 받아 뜻밖의 환대를 받았다. 배씨와는 그가 의학대학에 다니던 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여서 더없이 반가웠다.
초대 받아 갔더니 큰 상을 차려내며 환대해주었다. 배 박사는 1.4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 의정부에서 <북진의원>이란 병원을 냈다. 처음에는 두고 온 가족생각으로 울고불고 하더니 주위사람들의 권유로 재혼하여 안정되게 잘 산다고 한다.
나에게 평양구경을 시켜 준 사람은 김재덕(金在德)씨였다. 그는 평양의 토박이여서 관광안내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 씨는 나를 위해 며칠 동안 수고해주었는데 대동강 연광정(煉光亭), 모란봉(牡丹峰)의 을밀대(乙密臺), 능라도(綾羅島), 부벽루(浮碧樓)는 물론이고 강서 고구려 고분까지 빠짐없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능라도의 모래사장과 푸른 융단을 펴놓은 것 같은 무밭, 배추밭이 퍽 인상적이었다.
여행 중 의사이자 예술가인 김광업 씨를 만나 알게 된 것은 참 반가운 일이었다. 건축가 김중업(金重業) 씨의 형님인 운여 김광업(雲如 金廣業)씨는 평양에서 대명(大明)안과라는 병원을 열고 있었다. 그는 본업이 의사였지만 글씨도 잘 쓰고 전각(篆刻)도 잘 하는 숨은 예술가였다.
운여는 내가 평양에 온 것을 반가워하면서 기념으로 도장 두 방(方)을 새겨줬다. 하나는 낙랑고분에서 나온 관재목인데 ‘月田’이라고 새기고 다른 하나는 반달형 회향목으로 ‘장씨(張氏)라고 새겨서 선물로 주었다.
낙랑고분 관제목이 신기하기도 하고 전각도 무난해서 귀물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피난지 부산에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영도의 어느 집 2층을 새내어 살고 있었는데 전각가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가 찾아와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이런 인재(印材) 본 일 있어?” 하고 운여가 준 도장들을 자랑했더니, 철농은 술김에 잘 보지도 않고 “이까짓 거” 하면서 휑하니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날이 밝자 마자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지만 도장은 찾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귀물은 내 손을 떠나고 이제는 운여마저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6.25동란 뒤 월남하여 부산에 살면서 서예연구소와 안과의원을 경영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작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