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중국 침략에 이어 1941년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일제는 ‘신동아건설 성업(聖業) 달성’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람회와 작품발표 등의 예술 활동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제물은 1940년에 결성된 ‘문인서도연구회(文人書道硏究會)’로 ‘내선유지(內鮮有志)의 단합’이라고 표방한 문인화전을 열어야 했다. 한규복, 김용진, 고의동, 정병조, 안종원 씨 등 유명한 서양화가들이 울며겨자먹기로 출품했다.
42년 10월, 전람회가 전람회의 수입을 육해공군에 헌납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1회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畵聯盟展)’이 개최되었다. 무조건 그림을 출품해야 했던 지명화가로는 윤희순, 노수현, 백윤문, 배렴, 박승무, 이상범, 이용우, 이한복, 이응노, 고희동, 허백련, 김은호, 허건, 김용진, 김기창 등이었다.
‘남화연맹전’이 열리고 불과 몇 달 후인 11월에는 화가들에게 또 하나의 멍에가 씌워졌다. 조선미술가협회가 주최하고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후원하는 소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이라는 강요된 전람회가 생겨났다. <선전> 심사 참여인 김은호, 이상범은 불가피하게 위원으로 추대되고 <선전>의 추천작가인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도 초대작가로 지목되어 그림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총후미술전’은 42년부터 일제 해방직전인 44년까지 3회 동안 계속되었다. 전람회가 해마다 11월 초순, 장소는 ‘삼월오복점(三越五服店. 심셰게 전신)’, 정자옥(丁子屋. 미도파 전신), 삼중정(三中井. 충무로 입구), 그리고 화신백화점 등이었다.
여주에 있던 나도 출품하라는 통지를 받고 <총후미술전>에 작품을 내야 했다. 전시는 유난히 시국색을 강조하는 작품을 요구하여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나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수화를 그려도 군인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모습을 넣어야 했고, 농가의 사립문에도 일장기를 꽂아야 하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연극이 싫어서 불화(佛畵) ‘부동명왕(不動明王)상’을 모작했다. 부동명왕은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체의 악마,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해 정의의 화신으로 오른손에는 항마(降魔)의 검(劍), 왼손에는 오라를 쥔 채 큰 불꽃 속에서 버티고 앉아 있는 그림이다.
|
|
| ▲ 부동명왕(不動明王) / 필자가 총후미술전에 출품하기 위해 이 보동명왕을 모델로 삼았다. 이 작품은 운반 도중 비에 젖어 출품하지 못하고 사유서만 제출했다 |
|
약 60호쯤 되는 작품이었는데 서울까지의 운반이 문제였다. 그때만 해도 작품 운반수단이 전무한 형편에 버스를 이용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트럭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일반화를 위에 덧붙여서 작품을 싣고 서울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우장 하나 없는 이 트럭은 노상 비를 맞아야 했고 내 작품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뜻밖의 일이요 힘들여 제작한 공이 아쉽지만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그린 작품이라 어찌 생각하면 도리어 시원섭섭한 심정이기도 했다. 즉시 이러한 사유를 글로 써서 부득이 작품을 출품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총후미술전 사무국에 전했다.
이런 전람회 말고도 ‘성전(聖戰)미술전’ ‘국민총력포스터전’ 등이 있었으며 ‘금차회(金汊會) ’라는 여성단체까지 생겼는데 윤덕영(尹德榮)의 부인(회장)과 딸이 주동이 되어 한국가정에서 패물과 금붙이를 걷어서 헌납하던 어용단체였다. 윤 부인 등은 각 가정에서 공출 받은 금붙이들을 용산에 있던 조선군 사령부의 심택(深澤) 사단장에게 바쳤는데 헌납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다가 이당 선생에게 부탁해 그대로 그리도록 했고 서양화가 김인승 씨에게는 유기(놋쇠)를 공출하는 장면을 그리도록 했다. 그래서 해방 후에 반민특위(反民特委) 등에서 작가들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