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날 (32회)

일제의 전세가 하루가 다르게 불리해지자 우리는 마침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막연한 기대를 찾기 시작했다.

성천 유달영이 흥남(興南)으로 떠나면서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라고 한 말도 있고 해서 나는 어쩐지 시국이 긴박하게 느껴져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매일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8석 짜리 구형 라디오가 한 대 있었다. 성능은 좋지 않았지만 시사뉴스를 전해주는 유일한 기계였다.

때마침 대동(大同)고무 전은태 전무가 고향인 여주에 다니러 와서 나를 만나러 우리 집에 들렀다가 함께 광복의 낭보(朗報)를 들었다.

8월 15일 아침에 일본 천황의 중대방송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긴장하고 있던 참인데 라디오에서 이상한 잡음이 들여왔다. 전 씨와 나는 숨을 죽이고 라디오 앞에 바짝 다가 앉았다. 이윽고 들릴락 말락 한 힘없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왕(日王)의 방송이 나왔다. 드디어 일본이 패망하고 국제질서의 대변혁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강 건너 북내면 농민들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농기를 앞세우고 징과 북을 치며 기세등등하게 경찰서로 들이닥쳤다. 한편 청년들은 광목을 찢어 만든 자위대란 완장을 팔에 두르고 경찰서를 점령했으며 무기고를 장악한 뒤 일본인 경찰들을 뒤편에 있는 관사에 감금하였다.

강진수(姜振秀) 군수도 농민들에게 붙잡혀서 맞고 짓밟히는 봉변을 당했다. 강 군수가 봉변을 당한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농민들이 일대 전환기에 흥분한 탓도 있겠지만 강 군수는 군(郡)에 할당한 양곡 공출을 독려하면서 농민들에게 가혹한 부담을 강요했던 것이다.

반대로, 전임 군수였던 최문경(崔文卿) 씨는 양곡 할당량을 줄이기 위해 도에 가서 결사적으로 투쟁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농민들은 평소부터 강 군수에게 증오의 감정을 품어왔고 이 날을 계기로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전세가 역전된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일제의 끄나풀 노릇을 해온 내국인들, 즉 경찰의 형사나 행정관서의 민원(民願) 담당자들이 훨씬 더 큰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청년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동안 나는 개인적인 정으로 관사에 갇혀 있는 아리무라[有村] 경무주임을 면회하러 갔다. 나는 내 앞으로 날아온 징용영장을 직권으로 말소해준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어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줄 알면서도 한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현관에 들어서니 천만 의외라는 듯 깜짝 놀라면서 아라무라는 말없이 바라보고 그의 부인이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 호소하는 바람에 도리어 난처해졌다.

그런데 미군 진주가 늦어져 치안상태가 불안하여 치안은 당분간 일본 경찰이 맡으라는 미군 측의 지시가 왔다. 그리고 뒤 이어서 무장한 일본군 1소대가 도착하고 경찰들도 대응하여 일전일퇴의 혼란이 야기되었다. 우리는 혹시 일본인들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모두 숨을 죽였다. 아리무라는 총을 메고 우리 집에 찾아와 면회 갔던 일을 되새기면서 내 손을 곡 잡고 몇 번이나 감사해 했다.

나는 그해 10월 서울로 돌아왔다. 거처할 집이 마땅치 않아 마침 친하게 지내던 서양화가 화암(길진섭)을 만나서 사정을 말했더니 국악인 유기룡 씨를 소개해줬다. 유 씨는 안암동에 적산가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채가 비었다고 임시로 거기에서 살도록 주선해줬다.

그 집에 입주하고 며칠이 되었는데 문간방에 사람 기척이 있으면서도 들고 나는 것은 물로 밥을 지어 먹는 기색도 없었다. 하루는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남자의 기침소리만 간혹 들릴 뿐 밥을 못 짓는 눈치여서 무슨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으로 판단, 우리 식구가 먹는 대로 간소한 아침상을 차려 대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저 유명한 국창 임방울(國唱林芳蔚)이었다. 임 씨도 국악인 유기룡과의 친분으로 임시로 이 집에 들었던 모양이다. 짤막한 한 토막 기연이다.

▲ 국창 임방울(國唱林芳蔚 1905-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