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 적산집에 우거하고 있는 중, 종로 화신 맞은편 장안빌딩에 중앙문화협의회 산하의 <조선미술건설본부> 간판이 걸리고 미술인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나도 가끔 장안빌딩에 나가 미술인들과 어울렸는데, 이때의 본부 임원들은 고희동, 이종우, 김주경, 오지호, 김용준, 길진섭, 정현웅(서기장), 변관식, 배렴, 장우성,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김환기, 이인성 등이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윤효중을 일정(日政)시대의 과오를 들어 제명 처분했다.
어느 날 미군이 인천으로 진주한다고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굉장한 기갑부대일줄 알았는데 빌딩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추레한 카키복에 철모를 쓰고 카빈을 멘, 키가 훤칠한 군인들이 4열 종대로 종로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포장을 씌운 지프가 선도했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행진하는 것 같지 않게 터덜터덜 느리게 걷는 것이었다. 나는 저 사람들이 어떻게 독사 같은 일본군과 싸워 이겼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 후 종각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에 웬일인가 하고 가보았더니 가로수 그늘 아래 총을 든 일본군 백여명이 앉아 있었다. 한참 후 지프를 탄 미군 네다섯 명이 오더니 차에서 내려 일본군을 데리고 갔다. 말 한마디 못하고 고분고분 따라가는 일본군의 꼴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았다. 그것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통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문화인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여성(李如星) 이란 사람이 인민당(人民黨)을 만들어 미술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서양화가 이쾌대의 실형(實兄)이며 풍속적인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다. 민속학에도 밝아 민속의상에 관한 책도 내고 글도 쓰던 사람이다.
덕수궁에서는 1945년 10월 20일부너 30일까지 조선미술건설본부 주관으로 연합군을 환영하는 <해방기념미술전>이 열렸다. 이때 이인성이 포스터를 그렸는데 뒷면에 큰 글자로 ‘모든 권리는 인민에게’라고 횡서(橫書)하여 말썽이 되었다.
|
|
| ▲ 1945년 10월 개최된 해방기념미술전람회 / (뒷줄 오른쪽부터) 오지호, 이건영, 김용준, 필자, 배렴 씨 (앞줄 오른쪽부터) 정홍거, 이인성, 김재석, 윤자선, 이밖에 이종우(뒷줄 위에서 여덟번째), 노수현(가운데줄 앉은사람 좌로부터 네번째) 등 |
|
이 일 때문에 미술인들은 지금의 롯데백화점 자리에 있는 옛 중앙도서관 지하실에 모여서 논란을 벌였다. 사람들은 “이게 뭐냐, 빨갱이가 하는 얘기다”, “된다”, “안 된다”, “뭐가 나쁘냐”며 공방을 벌였다. 특히 고희동과 노수현이 좌경된 어휘라며 완강히 거부하고, 몇몇의 젊은 서양화가들은 당연한 일이라고 맞섰다. 이러한 진통을 겪는 가운데 <해방기념전>은 성대하게 막을 올렸다. 이것이 미술계 사상적 갈등의 시초인 것 같다.
<해방기념미술전>에는 고희동, 오지호, 이건영, 김용준, 장우성, 배렴, 박득순, 이중우, 김만형, 이쾌대, 최재덕, 노수현, 정홍거, 이인성, 김재석, 윤자선, 김주경, 이마동 등 많은 동·서양 화가들이 참여했다.
|
|
| ▲ 1945년 10월 20일 해방기념미술전람회 기념사진 / 앞줄 좌에서 세번째가 윤치영(정치인), 그 옆이 고희동, 이승만, (그 뒷줄 좌로부터) 조중현, 한 사람 건너 이쾌대, 이종우, 김용준, 배렴, 그 윗줄 좌에서 두번째가 필자, 윤자선, 한 사람 건너 박득순 |
|
해방기념미술전을 마치고 12월에 중앙고보에서 미술인 총회를 열어 <조선미술가협회(조선미협)>를 창립했다. 이때 고희동이 회장에 뽑혔다. 조선미협이 창립된 직후에 일제 강점기 최초로 2인 화집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었던 오지호와 김주경, 박영선이 떨어져나와 별도로 <미술동맹(美術同盟)>을 결성했다. 이후 조선미협 회장 고희동이 정치성을 띤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회원 30여명(주로 서양화가)이 이탈하여 <조형(造形)미술동맹(위원장 윤희순)>을 조직했는데 이 조형미술동뱅이 또 분열, <미술문화협회>로 나누어졌다. 미술문화협회는 위원장에 이쾌대, 사무장은 이봉상이 맡았다.
동양화단에서는 김영기, 이유태, 정홍거, 조용승과 내가 주동하여 <단구(壇丘)미술원>을 만들었다. 해방이 되어 문화계가 모두 들썩 하는 판에 동양화단도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숙명여고에서 미술인 총회를 열고 <대한미협(大韓美協)>을 발족시켰다. 이때의 임원은 고희동, 이종우, 배렴, 노수현, 장우성, 박득순, 장발, 이마동, 임학선, 임용만, 이응노, 도상봉, 이유태, 이상범 등이다. 이상범은 회원 사퇴 선언을 하고 재야로 물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