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되던 해 10월에 서울에 올라온 나는 거처할 집이 엇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1년 사이에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다.
맨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 안암동 적산가옥. 이 집에서 내가 우연히 국창 임방울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바 있다.
두 번째 이사한 집은 서울시청 영선과장으로 있던 정동석(鄭東錫) 씨 집이다. 정 씨 집은 돈암동 삼선교 근처 언덕배기 성(城) 밑에 있었는데, 안채하고 바깥채가 있어 우리가 바깥채를 빌려 살았다. 정 씨는 충북 청주사람인데, 그가 경성공업(京城工業) 건축과에 다니던 일제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그는 노래도 잘 하고, 미남이어서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그의 공업학교 졸업식은 이른 봄이었는데, 쌀쌀한 날씨에 졸업식에 참석해 주었다고 고마워했다. 정 씨는 졸업은 했는데 취직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 당시에도 취업난이 심각했기 때문에 졸업시즌만 되면 젊은이들이 거리를 방황했다. 얼마 후 경성부(京城府) 영선과에 취직이 되었고, 몇 해가 걸려서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집 바깥채에서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직 교섭을 받았다. 1946년 여름이었던가, 뜻밖에 근원(김용준)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이때 근원은 보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있었고 나와는 그저 만나면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였는데, 갑자기 내 집을 방문해서 의아스러웠다.
방에 들어와서 함께 차를 마시면서도 딴전만 피우고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나 하고 같이 어디 좀 가보자”며 일어섰다. 나는 옷을 입으면서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그는 “가보면 알 테니 어서 갑시다” 하고 대문을 나섰다. 가면서도 어디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삼선교에서 전차를 탔다. 종로4가에서 내리더니 서대문행 전차를 갈아타고 광화문에서 하차, 휑하니 시청 쪽을 향해 걸었다.
나는 궁금했지만 잠자코 따라갔다. 드디어 서울시청에 들어서서 1층 코너에 있는 어느 방 앞에 가서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바로 서울시 학무과장 방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학무과장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왜 학무과장을 찾아왔는지 깜깜이었다. 근원이 인사를 시키는데 학무과장은 저명한 서양화가 우석 장발(雨石 張勃) 씨였다.
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국립서울대학 안에 예술대학을 만드는데 미술학부 조직책임을 맡게 되었다면서 최초의 스탭을 구성하는데 동참해달라고 하였다. 근원과 의논했더니 “월전과 함께 일하는 게 좋겠다”고 추천했다는 경위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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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석 장발(雨石 張勃) [사진출처 : 임응식아카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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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석의 갑작스런 제안에 어리둥절해 말꼬리를 찾지 못했고, “나 같이 경험도 없는 사람이 중책을 맡을 수 있겠느냐”며 사양했다. 이때 아무 말 않고 앉아만 있던 근원이 “사양 말고 함께 일해보자”고 부추겼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인 제안이었지만 “좋은 일이니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신설되는 서울대 예술학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성북동 정 씨 집 사정 때문에 또 한 번 이사를 해야 했다. 계동(桂洞) 대동상업학교 운동장 밑에 있던 조반석(趙班石) 씨 한옥 집 사랑채를 빌려 어설픈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이 집에서도 기거가 안정되지 않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수화(김환기)가 “성북동에 2층 양옥을 한 채 사두었는데 집이 비었으니 우선 거기서 살라”고 했다. 성북동 수화집으로 이사해서 얼마 되지 않아 그 집이 팔려 버렸다. 집을 산 사람은 저명한 언론인 성재 이관구(誠齎 李寬求) 씨였다.
또 어디로 이사를 가나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마침 성재가 “피차 식구도 적으니 내가 아래층에 살고 월전이 2층에 살면 될 게 아니냐”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성재 댁에서 혜화동 195번지 미술대학 관사로 옮겨가게 될 때까지 신세를 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