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京城大學)으로 이름부터 바꾸었다. 미군정 법령 102호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령’에 따라 1949년 8월 22일 종합대학으로 개편된 것이다.
해리 B. 엔스태드 박사가 초대 서울대 총장에 취임, 12개 단과대학을 만들었는데 이때 예술대학이 신설되어 미술학부와 음악학부가 생겼다. 예술대학 미술학부는 학생모집에 앞서 교수진부터 정비했다.
발족 당시에는 회화과, 조소과, 도안과 등 세 학과였으나, 개강할 당시에는 회화과를 둘로 나누어 제1회화과(동양화), 제2회화과(서양화)로 분리했고 그 후 다시 학과 개편을 단행, 동·서양화과를 합쳐 회화과로, 도안과는 응용미술학과로 이름을 바꿨다. 얼마 후에 미학과를 신설해서 명실공히 미술교육의 전문화를 꾀했다.
다른 단과대학들은 1946년 6, 7월에 학생모집을 끝냈는데, 새로 생긴 예술대학은 9월에 1회 학생을 뽑았다. 지1회화과, 제2회화과, 조소과, 도안과(응용미술)에서 모두 91명의 미술학부 학생을 선발했다. 이때의 입학자격은 대학 예과ㆍ고등학교 수료, 4ㆍ 5년제 중학 졸업자, 특별시험에 합격한 자로 되어 있었다. 수험 과목은 국어, 외국어, 수학, 실기, 구술, 체격검사 등이었다.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의 산실(産室)은 지금 문예진흥원 자리에 있던 경성제대 법문핚부 건물 제1, 제2 강의실이었다. 이 교실엔 긴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을 뿐 아무 시설도 없었다. 입학시험 실기를 치르는데 석고상이 없어서 장발 학장의 주선으로 휘문ㆍ중앙학교에서 빌려다 썼다.
입학시험을 치러 처음으로 입학한 91명의 신입생 이름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동양학과에 박노수(朴魯壽), 장운상(張雲祥,) 권영우(權寧禹), 박세원(朴世元), 서양학과에 문학진(文學晉), 정창섭(丁昌燮), 김진항(金鎭恒), 유영필(柳榮苾), 조각과에 백문기(白文基), 성낙인(成樂寅), 장기은(張基殷), 유한원(柳漢元) 등이다. 이 사람들은 현재 한국 미술계의 중심이 되었고 몇 사람은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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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미대 1회생들과 승가사에서 / 세째줄 바위에 기대 선 이가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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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시험을 치르고 그 해(1946년) 9월 18일에 개교식을 가졌다. 그때는 해방직후 혼란기여서 좌·우익 싸움이 치열했다. 서울대의 국립대학안이 발표되자, 5개 전문학교에서 반대의 기치를 올려 마침내 서울대까지 비화, 동맹휴학으로 들어갔다. 국대안(國大案) 반대 파동은 마침내 좌우익 투쟁의 불씨가 되어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미술학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주동자 김진항(金鎭恒) 군 말고도 20여명의 제적자들을 냈다. 게다가 국대안 파동으로 등록 안한 학생이 많아서 편입생을 뽑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닥쳤다.
편입생 선발공고가 나자 전 영남대 교수 서경보(徐鏡普) 씨가 내가 우거하던 계동 집에 찾아왔다. 그때 서 씨의 이름은 서홍옥(徐弘鈺)이었는데, 나와는 낙청헌에서 공부할 때 안면이 있는 터였다. 그가 아우인 서세옥(徐世鈺) 군을 데리고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방에 들어선 서군은 형의 지시에 따라 넙죽 큰 절을 하였고, 홍옥 씨는 아우의 입학을 선처해달라고 간청했다.
편입학 시험을 치를 때인가, 미대 실기실인 목조건물 옆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수험생 한 명이 죽을 떠먹고 있었다. 이상해서 물어보니 학무모인 듯한 중년 남자가 “이 아이가 위가 나빠 밥을 먹지 못해 집에서 죽을 쑤어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학생이 나중에 서울미대 학장까지 하게 된 조각가 김세중(金世中) 군이다. 이때 명동성당 소속 수녀이던 안혜택(安惠澤)도 미술학부 동양화과에 편입하여 화제기 되었다.
교수실은 경성제대 시절의 미학과 도서실에 마련되었다. 도서관이어서 방에 책이 꽉 차 있었는데 서가 사이사이에 책상을 놓고 교수실로 썼다. 초기의 교수진은 동양화과를 근원(김용준)과 내가 맡고 서양화과는 수화(김환기)와 화암(길진섭)이 담당했다. 조소과는 윤승욱(尹承旭), 김종영(金鐘瑛)씨가 도안과는 이순석(李順石), 이병현(李秉賢)씨가 맡았다. 김종영 씨는 발령만 받아 놓고 고향인 경남 창원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나중에 신설된 미학과는 경성제대 미학과 출신인 박의현(朴義鉉)씨와 일본 상지대(上智大) 철학과를 나온 박갑성(朴甲成)씨가 임명되었다. 서양화과 교수로 처음에는 설초(이종우)를 추천했으나 그가 응낙하지 않아 그 자리가 화암에게 돌아갔다.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학부는 차차 자리가 잡혀 교수진을 확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래서 동양화과는 심산(노수현), 영운(김용진), 소전(손재형) 등을 강사로 맞아들였다. 이때 문예 강의도 했는데,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씨와 가람 이병기(伽藍 李秉岐) 씨가 출강해서 이채로웠다. 월탄은 소설, 가람은 시조 강의였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