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19일. 문교부가 서울대 종합대학안을 발표하자 사흘 만에 좌익계 학생들의 반대 성명이 나왔다. 1949년 8월 27일, 법령 102호로 ‘국대안(國大案ㆍ국립대학안)’이 공포되자 9월 5일에는 5개 전문학교 학생회에서 국대안 반대를 결의하고 성명을 발표했고, 서울대에서도 이공학부(理工學部) 교직원 39명이 국대안을 반대하고 사직을 결의했다.
예술대학이 개교(9월 18일)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서, 10월 4일 문리대학이 맨 먼저 맹휴에 들어갔다. 예술대학도 출범하자마자 국대안 반대 소용돌이 속에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술학부에서는 국대안 반대 선봉장 김진항 군이 퇴학당하고 일부 학생은 등교를 거부했으며 마침내 근원, 수화, 화암 세 교수가 사표를 내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다.
장발 학과장의 만류로 교수들의 사표는 반려되었으나 때가 때인 만큼 분위기는 계속 어수선했고, 학사일정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지금은 학교마다 미술대학이 있지만 그때는 서울대학이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교수나 학생이나 모두 곤혹스러웠다.
그와는 별도로 새로 출발하는 미술교육의 이념과 진로 설정이 초미의 급선무였다. 특히 동양화부는 전통예술이면서 그동안 일본풍에 감염된 외에 서구(西歐) 바람에 휩쓸려 올바른 골격을 갖추지 못하고 온 것이 사실이었다. 새로운 전기가 요구되는 이 시점에 새 지평을 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학부 교수들은 민족미술 건설을 위해 좌표를 설정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전통을 살리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근원과 나는 책상을 마주 놓고 앉아 틈만 나면 논의하였다.
다행히 교수실이 전 경성제대 미학과 도서실이어서 미학, 예술학, 미술사, 화집 등이 빽빽이 들어서 있어서 앉은 자리에서 손만 뻗으면 필요한 자료를 얼마든지 볼 수 있어 참으로 행운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근원과 나는 교수라기보다 학생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토론했다.
동양미술사를 보면 중국화(中國畵)를 남화(南畵), 북화(北畵)로 나눈다. 당(唐) 이전에는 북종(北宗)이 주류였고, 당 이후는 송(宋), 원(元), 명(明)을 거치며 남종화(南宗畵)가 득세했는데, 남화 문인화가 동양화의 정통(正統)임은 미술사의 정설(定設)이다. 우리는 정신 위주의 남화, 문인화 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결론지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후에 생긴 홍익(弘益) 미대(美大)는 채색중심 사실화를 주종(主宗)을 가르쳤고 서울 미대에서는 수목 위주로 지도해서 현재까지 그 행적이 다르게 전개되어 온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1949년 우리 정부가 수립된 뒤 장면(張勉), 조병옥(趙炳玉), 김활란(金活蘭), 모윤숙(毛允淑), 정일형(鄭一亨) 씨 등 한국 대표단이 파리에서 열린 3차 유엔총회에 참석, 한국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을 때에도 나도 조그만 역할을 한 셈이다.
그때 미대학장 우석이, 자기 형님(雲石 張勉)이 중요한 사명을 띠고 유엔총회에 참석하는데 우리나라 특징을 담은 그림을 좀 그려 달라고 나에게 간청했다. 소품이지만 한두 점도 아니고 50점이나 되어서 망설이던 끝에, 그것이 사사(私事)가 아니고 중요한 공용(公用)이기에 수락하기로 했다. 알고 보니 이 작품들은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선물로 쓰였다고 한다. 나중에 우리 대표단의 활동이 성공적이었음을 듣고 나는 큰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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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엔총회참석 한국대표단 / 아래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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