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월 4일 백농 최규동(白儂 崔奎東)박사가 서울대 제4대 총장에 취임하고 각 대학의 교사를 재배정했다. 서울대학교 행정의 기초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본부의 이 같은 조치로 미술대학은 법과대학이 쓰던 건물로, 법과대학은 미술대학이 쓰던 건물로 옮기게 되어 있었다. 건물의 구조나 면적에 따라 각각 용도에 맞게 배정한 것이다. 그런데 법대가 건물을 비워주지 않고 버티었다. 건물이 쓸모가 더 있기 때문인지, 법대 측이 일방적으로 억지를 부렸다.
언제까지 법대의 처분을 기다릴 수 없을 분만 아니라 미대는 당장 교사가 필요한 형편이라 우선 법대가 들어갈 건물로 간 다음, 법대 측에 건물을 비워달라고 독촉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장발 학장을 앞세우고 법대에 담판하러 갔다. 우리 쪽에서는 교무과장 박갑성 씨와 학생과장이었던 내가 배석했다. 법대 쪽은 이선근 학장, 한태연 교무과장이 자리를 함께 했다.
깐깐한 장발이 “공문 받았지요?” 하며 먼저 포문(砲門)을 열었다. 이선근 학장은 “받기야 받았지요.” 하고 떫은 표정을 지었다. 장발이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다그치자, 한태연 씨가 불쑥 나서서 “그런대로 쓰는 거지 뭘 그러느냐”고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건물을 비워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우리들은 자리를 뜨면서 모든 것은 본부의 지시에 따라야 할 게 아니냐고 엄포를 놓았지만 법대 쪽은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었다.
법대의 고집 때문에 배정 받은 교사에 들지 못하고 내내 어설픈 더부살이 신세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해방직후부터 사람들은 심기일전(心機一轉) 하지 못하고 이런 억지와 배짱이 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차일피일 하다가 6·25 동란을 당해 교사타령은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예술대학이 생기면서 첫 번째 뽑은 동양화과 학생 중에는 많은 수재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박노수와 서세옥이 유달리 재능을 보였다.
박노수 학생은 동숭동 낙산 중턱의 판자 집에서 방 한 칸을 빌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 나와서 늦은 시간 까지 그림을 그리고 별로 결석도 하지 않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아무 연락도 없이 며칠 동안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박 군이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몸이 아파서 못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학생을 앞세우고 그날 방과 후에 박 군의 자취방에 가보았더니 돌봐주는 사람 없이 위장병이 심해져 먹지도 못하고 혼자 앓고 누워있는 중이었다. 나는 “병이 나면 약을 먹어야지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면 어떡하냐”고 말하고 박 군을 일으켜 세워 마침 바로 혜화초등학교 앞에 있는 내가 잘 아는 윤길영 한약방으로 데리고 갔다. 위장병이 심하고 영양상태도 좋지 않은 모양이어서 약을 몇 첩 짓고 계란도 한 줄 사서 돌려보냈다.
그 무렵 나는 학생과장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가끔 수학여형에 따라다녀야 했다. 한번은 미학과 학생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담당과장인 박의현 씨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박 교수는 경성제대(京城帝大)출신으로 시조도 할 줄 알고 시를 좋아해 경주여행 중에도 같이 법주(法酒)를 즐겼다. 석굴암과 불국사, 남산 등 주요 사적을 돌아보면서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유물의 예술성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박 교수의 간청에 의해서다.
미술학부는 식구가 단출해서 교수나 학생이 친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과가 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금세 사발통문이 돌곤 했다. 그때만 해도 모델 구하기가 어려울 때였는데, 한번은 조각과에서 멋진 모델을 구해왔다고 학생들이 수군거려서 교수들이 얼마나 멋진 모델인데 이렇게 요란스러운가 싶어 조각과 교실까지 가보았다.
늘씬한 키에 잘 발육된 체구가 과연 좋은 모델이었다. 이 소녀는 직업모델이 아니라 어느 학생의 친구로서 잠깐 바람을 피웠던 듯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에피소드로 적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