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명록(芳名錄)은 첫 개인전 때 참석해주신 여러분들의 축하 서명록이다. 6미터짜리 두루마리 방명록을 만들어놓고 내빈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거기에 쓰여있는 명사들의 친필서명을 대하면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명사들의 면면을 보면 김진섭(金晉燮ㆍ수필가), 김기승(金基昇ㆍ서예가), 이해선(李海善ㆍ사진작가), 유달영(柳達永), 박영준(朴榮濬ㆍ소설가), 노기남(盧基南ㆍ대주교), 홍종인(洪鍾仁ㆍ언론인), 송지영(宋志英ㆍ소설가), 유일엽(柳一葉ㆍ스님), 김재석(金在奭ㆍ도예가), 윤효중(尹孝重ㆍ조각가), 이순석(李順石ㆍ공예가), 이기붕(李起鵬) 박마리아 부부, 김소운(金素雲ㆍ수필가), 김동리(金東里ㆍ소설가), 김정환(金貞桓ㆍ무대장치), 윤석오(尹錫五ㆍ서예가), 정인보(鄭寅普ㆍ한학자), 정규창(丁奎昶ㆍ영문학자), 한상진(韓相鎭ㆍ미술평론), 김종영(金鍾瑛ㆍ조각가) 씨 등이다.
동·서양화가들만도 김환기, 박상진, 이상범, 김영기, 김용진, 장석표, 박고석, 이쾌대, 노수현, 장욱진, 배렴, 김원, 배운성, 남관, 김명기, 김기창, 박내현, 원석연, 이응노, 김인승, 백영수, 고희동, 박영선, 이인성, 조병덕 씨 등 수없이 많다.
한편 내가 평소에 높이 모시던 어른 중 한 분인 위당 정인보 선생은 나의 전람회를 위하여 일부러 전시장에 오셨고, 방명록에 ’특개일경(特開一境)‘이라고 한자로 썼다. 그리고 바로 뒤 6·25가 터졌고 이어 선생은 인민군에 납치됐다. 이 ’특개일경‘ 네 자와 방명록 세 자의 글씨는 어쩌면 선생의 절필(絶筆)인지로 모른다. 이 방명록을 펼쳐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 후 어느덧 5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러는 동안 세사인정(世事人情)도 터무니없이 변했다. 존경하는 선배나 정답던 친지들 중에 타계한 분도 많고 멀리 떠나가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분들도 많아 이 두루마리 방명록을 펼쳐보고 있으면 문득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주체할 길이 없다.
그때 전시회가 끝나면서 바로 6·25동란이 터져서 미처 손쓸 사이 없이 전시했던 작품 태반을 잃어버리는 소용돌이를 겪고도 이제껏 이 명록(名錄)이 내 손에 남아 있다는 것이 희한하다.
세상은 변하고 역사는 흐르기 마련이다. 이에 총총히 사라져간 아련한 발자취들을 더듬으며 어쩐지 허허로운 벌판에 외로이 선 듯 스산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몇 줄의 감회를 적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