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나는 집에서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서울대 관사(혜화동 111번지)에 살고 있었는데 그 날이 일요일이어서 도배장이 두 사람을 불러 일을 하고 있었다.
종이를 사서 혜화동 로터리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고,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군가를 부르며 동소문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일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38선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오후 네 시 경인데 비행기 소리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리개 같은 소형 비행기가 남산 위를 맴돌고 있는데, 그때 우리 쪽에는 배행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욱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남산 위에서 신세계백화점 뒤 전신전화국 부근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비행기는 인민국의 소련제 <야크>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차츰 멀리서 포 소리가 들려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학교애 출근했다. 교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는 계속 안심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도 아군이 38선을 쳐내려오는 적군을 밀어붙였다고 걱정할 것 없다는 방송을 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그렇지가 않았다. 포 소리는 더욱 가까이서 들려오고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불안했지만 무슨 정보라도 들을까 해서 27일에는 일찍이 학교에 나갔다. 다른 교수들도 전원 출근, 피난문제를 의논하고 있는데, 장발 학장이 효자동에 있는 교황사절관에 다녀왔다. 장 학장은 거기서 들은 이야기라며 절대로 걱정할 것 없다고 교수들을 안심시켰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학장에게 긴급 건의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돈이 필요할 것이니 비상수단으로 돈을 찾아 만일에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내 건의에 다른 교수들도 동조, 학장이 사무직원을 시켜 돈을 찾자 비상금으로 비치해두었다.
저녁때 쯤 동정을 살피느라 혜화동 로터리에 나가봤더니 남부여대하고 의정부 쪽에서 내리 밀리는 피난민 행렬이 줄을 이어 대학로로 내딛고 있었다. 하늘을 잔뜩 찌푸리고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만일 시가전이 벌어진다면 돈암동에서 1차 저항을 하고 혜화동 로터리가 격전장이 될 것이 번했다. 그래서 한성여고 밑 으슥한 곳에 살고 있는 처남집으로 우선 식구들을 피신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미 사태는 심각했다.
삼선교 다리에서부터 돈암동 일대가 먼지안개로 뽀얗게 덮여 있고 군데군데 헌병이 서 있는데 미아리 쪽에서 부상병을 실은 쓰리쿼터가 전속력으로 시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뜀박질을 해서 헤화동 집으로 달려오며 살펴보니 동성중학 강당이 임시 야전병원이 된 듯 학교 앞이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허탈하게 앉아 있다가 시가전의 경우 대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부엌 마루 밑에 있는 저장고를 치우고 대피소를 만들어 놓았다.
밤이 되면서 비는 장대같이 쏟아졌다. 11시쯤 되었을까. 누가 문을 두드렸다. 섬뜩해 몸을 사리다가 말 소리를 들으니 식구들이었다. 우리집 식구들뿐만 아니라 처남댁 식구까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밀려나가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우리 식구들은 불안 초조한 가운데 한잠 못자고 하룻 밤을 뜬 눈으로 세웠다. 새벽녘에 돈암동 쪽에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동이 트면서 잠잠해졌다. 이른 아침 앞집에 사는 박 노인이 찾아와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왔다”고 알려주었다.
일이 크게 벌여졌다고 생각되어 망연자실하고 앉아 있다가 인민군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기 위해 혜화동 로터리로 나갔다. 사이드카가 앞 장 서고 긴 트럭 행렬이 들어오고 있는데 광목으로 만든 황토빛 군복을 입고 끈으로 엮은 망이 달린 모자를 쓴 인민군이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다. 이때의 로터리주변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아군의 시신과 버려진 소총들이 널려 있어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인민군이 들어온 서울을 표면상 조용했다. 시민들도 불안한 가운데 숨을 죽이고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들은 세상이 완전히 뒤집힌 것으로 판단하고 재빨리 적의 앞잡이가 된 예도 많다.
어느 날 미술대학 학생 한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그는 허리에 붉은 글씨가 써진 완장을 지르고 들어와 인민군과 함께 시내는 돌아보고 오는 길이라며 “기를 꽂아야지요” 하고 서슴지 않고 인민공화국기를 그려 대문에 꽂아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때까지 나는 인공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