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며칠 후 장발 학장의 차를 운전하던 기사 이성규가 찾아와서 “내일은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줬다. 이 기사는 우리집 앞에 세 들어 살고 있어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터였다. 이 기사는 학교에 불려가서 한상원 이란 학생이 위협하여 그가 시키는 대로 학장차를 몰고 다녔는데, 그 와중에 학생회의에서 교수집 습격을 결의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기사의 정보대로 그 이튿날 명륜동 1가의 장발 학장집과 관수동의 윤승욱(尹承旭)학생과장 집에 학생들이 몰려가 소란을 벌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장발 씨는 이미 피신한 뒤였고, 윤승욱 씨도 고향(수원)으로 내려간 후였다.
나도 외출해서 집에 없었지만 학생들이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았다. 장발 씨는 그 후 광주와 서울의 잘 아는 가톨릭 신자 집으로 피신하였고, 윤승욱 씨는 그 날은 무사했는데 얼마 후에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잠깐 들었다가 난동학생들에게 붙잡혀간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런 일이 있은 며칠 후 동양화과에 다니던 김천배(金天培)란 학생이 내게 찾아와 미대학생들이 회의를 열고 교수들을 인민재판에 붙였다고 알려줬다. 그는 x라는 학생이 학교 태극기를 꺼내 여러 사람 앞에서 짓밟고 찢었다고 험악했던 분위기도 설명했는데, 그 학생은 바로 내 집에 와서 인공기를 그려준 학생이었다.
동양화과 교실에서 궐석으로 열린 인민재판은 칠판에 교수들의 이름을 써놓고 하나씩 단죄했다는 것이다. 맨 먼저 장발 학장의 이름을 쓰고 소위 재판장이란 학생이 “처단해야 하느냐?”고 학생들에게 묻고 “옳소”라는 찬동을 받아 처단을 결정했다고 김 군은 현장을 보듯 소상히 설명했다. 윤승욱 씨도 학생과장 당시 국대안 반대학생을 처결하는 과정에서 좌익학생들에게 미움을 산 탓인지 처결로 결정되었다고 했다.
김 군은 내 이름을 칠판에 썼을 때에는 아무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는데, 한 여학생이 처단을 주장했다고 일러왔다(그 여학생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 그러자 경주 출신의 김동철(金東哲)이란 학생이 나서서 “그 사람이 처단 대상이 되느냐. 학교에 잘못한 일이 있느냐”고 항변,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김 군은 인민재판과정을 빠짐없이 얘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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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가 김팔봉(양복입은 사람), 전재홍이 인민재판을 받고 있다 (1950.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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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재판이 있은 며칠 후 학교에서 통지가 왔다. 구직원은 일단 등교하라는 명령이었다. 겁이 났지만 할 수 없이 나가봤다. 그랬더니 석고상이 몇 개, 이젤이 몇 개 하는 식으로 비품(備品) 목록과 수량을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교수들은 모두 강의실에 입실시키고 교양을 시작했다.
교양강사는 뜻밖에도 우리와 함께 미대 교수이던 근원 김용준 씨였다. 그는 손에 <인민보(人民報)>를 말아 쥐고 강의실에 들어와 서두부터 영특한 인민군이 부산으로 밀고 내려가는데 미군이 패주 중이라고 열을 올렸다. 나는 근원의 돌연한 변신이 이상했지만 속절없이 그의 동정만 살폈다. 수령과 인민군 찬양으로 일관된 교양을 마친 다음 이제 구직원은 파면령이 내렸다고 알려왔다. 뒤퉁수를 얻어맞은 기분인데다 뒷일이 걱정이었다.
말 한마디로 파면통보를 받고 얼떨결에 집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현초(이유태)가 찾아왔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가 싶어 반겨 맞았더니 현초는 말보다 먼저 붉은 잉크로 쓴 쪽지를 내밀었다. 좌경한 동양화가 이팔찬(李八燦)이 보낸 편지였다.
이팔찬은 현초와 함께 일본제국미술학교를 다닌 공주 출신 화가로 나와도 잘 아는 터였다. 잔 글씨여서 어른어른 했지만 내용인즉 내일 하오 두 시에 혼마찌[本町通·충무로] 가네보[鐘紡]에서 미술인 열성자대회가 있으니 후일을 생각해서 월전과 같이 꼭 참석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현초와 함께 열성자대회에 가보니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들어설 자리가 없어 비집고 들어가 뒷벽에 기대고 서 있는데 사회자는 감옥에서 갓 나온 듯 머리를 빢빡 깎은 서양화가 기웅(基雄)이었다. 그는 김일성 동무가 남한사람을 다 용서해도 미술가 가운데 고희동과 장발 두 사람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지시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열변을 토했다.
현초와 나는 열성자대회를 보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우연히 근원을 만나 동행했다. 평소 같으면 무슨 대화라도 있었을 터인데, 그 날 따라 근원은 말 한마디 없었고, 우리는 묵묵히 걸어가다 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