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김일성-스탈린 초상화 (47회...

미술인 열성자대회에 다녀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동양화과 학생인 김천배 군이 또 찾아왔다.

“지금 충무로 가네보에서 화가들이 모여 김일성과 스탈인의 대형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알려주면서 “선생님도 그 작업에 참여해야 반동분자로 몰리지 않는다”며 초상화 그리기를 권했다. 그때는 어딜 가나 증명이 있어야 했고, 식량도 순전히 배급에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명이나 식량도 문제지만 자칫 반동분자로 몰리게 되면 큰일이라 생각되어 현초와 함께 초상화를 제작하고 있다는 가네보에 가 보았다. 넓은 홀에 광목을 통으로 몇 필씩 쌓아놓고 사다리 위에 올라가 몇 백호짜리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작업장에는 이팔찬(李八燦), 정종여(鄭鐘汝), 이쾌대(李快大), 최재덕(崔載德), 김만형(金晩炯) 등 모모한 화가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와 현초는 작업하는 옆에서 기웃거렸지만 평소 친지였던 누구하나 반기는 사람이 없고, 반기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멋쩍어서 뒤퉁수를 긁으며 뒤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발붙일 곳조차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 6·25전쟁 인민공화국 치하 3개월 동안 서울에서는 거의 매일 김일성과 스탈린을 우상화하는 집회가 열렸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그때 미술동맹본부였던 가네보에서 화가들에게 배급표도 주고 증명도 발급했다. 어느 날 나는 증명서라도 받아볼까 하고 사무실에 찾아갔다. 어두컴컴한 방에 큰 테이블을 놓고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비서인 듯한 곰보얼굴의 아가씨 한 사람이 조그마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 두리번거렸더니 아가씨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이때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선생님, 참 오래간만입니다”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얼른 보니 국대안 반대투쟁 때 퇴학당한 예술대학 서양화과에 다니던 김진항 군이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여 비서에게 “전에 우리 선생님이셨다”면서 의자를 내드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냐”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김 군은 서슴없이 “감옥에 있다 나왔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으며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그는 태연히 어떻게 오셨느냐며 깍듯이 존대했다.

나는 더욱 불안했다. “증명을 받으러 왔다”니까, 김 군은 비서에게 “우리 선생님 잘 좀 도와드리라”고 한층 호의를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여비서가 내준 종이에 인적사항을 써서 주고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얼은 나왔다.

김 군이 “증명서를 해놓을 테니 일간 다시 나오시라”고 말했지만, 나는 다시 갈수가 없었다.

그 무렵 북괴는 의용군을 편성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젊은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고, 총검을 든 인민군이 동직원을 앞세우고 밤낮없이 가택수색을 했다. 이때 극도로 불안해서 백방으로 궁리한 끝에 피신하기로 하고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 잠깐 살던 삼선교 정동석(鄭東錫) 씨 집에 찾아가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때 정 씨는 건축기술자로 시청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이면 안전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검색이 워낙 심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피해 볼 생각을 했다. 일부러 밥도 안 먹고 이틀을 굶었더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환자증명을 얻을 생각으로 병원을 찾아 나섰다. 아는 병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삼선교 근처에 적십자 마크가 달린 병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원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고의로 엄살을 하며 진찰대에 앉았더니 의사는 “많이 상했다”며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병력(病歷)을 물었다. 내가 “늑막염으로 죽다 살았다”고 했더니 의사는 “폐가 나쁘다”면서 요양해야겠다고 말했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진단서를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중명진단서를 받은 후 집에 와서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있는데 동네 반장이 찾아와서 이북으로 이사가라고 권했다. 거기 가면 집도 주고 양식도 주며 가구까지 거저 준다고 충동했다. 그러면서 내일 당장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진단서를 내보이며 가더라도 몸이 좀 회복되어야지 이 상태로 가다가는 길에서 죽을 것 같다고 말미를 얻었다.

이때 뜻밖에 미술대 학장직을 맡은 근원(김용준)이 날이 저무는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 천만 뜻밖이었다. 근원은 방에 들어오더니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놀라워했다. 그러나 매우 겸연쩍은 기색으로 말없이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뭔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 분명한데 내 몰골을 보고는 말문을 열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때 유엔군이 물밀 듯 다가오고 있고 인민군이 후퇴를 거듭해 전세가 역전, 일부 인민군은 서울에서 퇴각하고 있을 때라, 이 긴박한 시기에 근원이 무슨 경황에 나를 찾아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나 근원은 막다른 골목에서 혹시 나와 어떤 선후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닌지?

그때 근원은 병약한 부인과 열 살도 안 된 딸아이가 있어 엄동설한에 길을 나설 수 없을 때다. 나는 그 날의 쓸쓸했던 근원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