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은 씨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서울 권농동(勸農洞) 161번지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선생 댁 낙청헌(絡靑軒)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에는 그림공부를 하는 청년들이 여럿 있었다. 선생은 소개편지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이제부터 함께 공부를 하게 된 여주의 장우성이라는 청년이라고 나를 좌중에 소개시켰다.
이 무렵에 나와 함께 낙청헌에서 공부한 사람은 향당 백윤문(香塘 百潤文), 일관 이석호(一觀 李碩鎬), 규당 한유동(葵塘 韓維東), 취당 장운봉(翠堂 張雲鳳),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심원 조중현(心園 趙重顯), 운당 조용승(芸堂 曺龍承),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 등이다.
이때 운보는 운포(雲圃), 심원은 기산(岐山), 현초는 소영(素影)이라는 아호를 썼다. 나보다 두어 해 먼저 입문한 운보는 머리를 박박 깎고 깃이 높은 검은 학생복을 입고 다녔다.
나는 이당 선생이 연령이 높은 노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중년이었다. 내가 19세였으니까 그때 이당 선생의 연세는 나보다 20년 연장인 39세밖에 안되었다. 그런데도 위엄이 대단했다. 이미 제전(帝展, 제국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터여서 벌써 중진작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분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 선생이 돌아가신 지가 10년이 지난 때여서 위력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당은 낙청헌에 놀러온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렸다. 붓놀림을 하다가도 누가 뭐라고 하면 “응 그래, 그 녀석 고약한 놈이군” 하고 말참견을 했다. 이당의 화숙은 서당식이었다. 아침 먹고 가고 싶은 시간에 가서 견학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의 공부 방법은 이당 선생이 주문받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는 게 고작이었다. 전시회에 출품이라도 할 경우에는 스케치를 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평을 듣곤 했다. 물론 예술이나 철학에 관한 강론 같은 것은 없었다.
당시 이당 선생은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목이 아프다고 목도리를 두르고 김용채(金容彩) 병원에 통원했다. 이때 그 댁 사랑에 자주 놀러오던 사람은 화가인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 심향 박승무(心香 朴勝武)와 한문학자 해려(海旅 林尙鐘) 씨 등이었다.
무호는 효자동 칠궁(七宮) 앞에 살고 있었는데 동경미술학교를 나와 그림도 잘 그리고 글씨도 잘 쓸뿐만 아니라 고미술 감식안도 높았다.
심향은 원서동(苑西洞)에 살면서 이당 댁에 자주 왔다. 자리에 앉으면 입바른 소리를 잘하고 남의 흠을 곧잘 꼬집어내면서 거친 말을 하기도 했다.
한문학자인 해려는 체구가 비대했는데 나중에 경기중학에서 한문도 가르쳤다. 경상도 말씨인데도 느릿느릿해서 이당에게 “말 좀 빨리 하라”고 지천도 들었다.
지금도 안 잊히는 사람은 살짝 곰보인 이주사(李主事)라는 분이다. 이 양반은 항간의 소식을 잘 전하는 사람으로 머리에 기름을 자르르 흐르게 바르고 항라 두루마기에 맥고모자를 쓰고 단장을 짚고 잔뜩 모양을 내고 다녔다.
권농동 이당 댁 앞은 대(竹)을 잘 그리는 일주 김진우(一州 金振宇)의 집이고 바로 아래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이 한때 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