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종군화가사무실에 들렸더니, 미술대장 강경모 중위가 경주에 있는 미10군단 사무실에서 전사관(戰史官) 추천 의뢰가 왔다며 의향이 있으면 이력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나는 대학에 재직 중이고 전사관이란 생소한 일이어서 망설였으나 현재의 나로서는 별 도리가 없고 학교도 후면상태여서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1931년 1월 31일, 10여 일간의, 답답한 대구생활을 마치고 경주로 갔다. 나는 정훈국 보도과장 고심덕(高心德) 씨의 차로 강경모 중위의 안내를 받아 하오 다섯 씨쯤 경주에 있는 10군단 사령부에 도착했다.
첫 대면한 전사과(戰史課) 책임자 애트우드 소령의 친절에 우선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와있던 현초(이유태)를 만나서 기쁘고 서양화가 김인승 씨와 사학자인 서울대 교수 한우근(韓㳓劤) 씨, 연세대 교수 홍이섭(洪以燮) 씨, 의사 현봉학(玄鳳學) 씨 등과도 만나서 반가웠다.
그날 저녁, 필리핀 출신 라바노 상사의 안내로 세면을 하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난생 처음 입어보는 군복이고 그것도 미군 장교복이기에 순간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녁도 장교식당에서 미군들과 같이 먹었고, 우리들은 야간침대가 놓인 막사에서 친지들의 해후를 즐거워 하며 밤늦도록 담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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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이섭 씨 (전 연세대 교수 1914-1974) / 사진출처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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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부터 전사기록에 필요한 전문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애트우드 소령과 쇼트 소령이 강의를 맡고 미군 대위 두 사람이 조교 노릇을 했다. 나중에 민석홍 교수와 서양화가 김원(金原), 김흥수(金興洙), 극작가 주태익(朱泰益) 씨도 우리 전사과에 들어와 같이 교육을 받았다.
전사관 교육은 3주 동안 게속 되었다. 2월 21일에 전사관 교육이 끝났는데, 애트우드 소령은 교육을 마치는 수료식을 열고 우리들에게 수료증도 수여했다. 뿐만 아니라 졸업파티까지 베풀어 우리들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나는 경주에서 전사관 교육을 마친 후에 외출허가를 받아서 버스 편으로 부산을 거쳐 창원(昌原)의 김종영(金鍾瑛) 씨 집에 갔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아우 장우홍(張隅鴻)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어 허탈한 마음으로 부산에 나와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전사과는 경주 최 부자 집에 초청되어 환대를 받았는데 우리 한인 전원과 미군소령 대위 등 상사 10여명이 참석하였다. 라바노 상사는 총을 메고 초대에 응했다. 최 씨 댁에서는 전통 한식을 융숭하게 차려 우리를 환대했고, 미국 친구들도 매우 흡족해 해서 즐거운 하룻밤이 되었다. 그때가 2월 10일께였는데 경주의 봄은 빠른듯하여 박물관 뜰의 산수유 나무는 어느새 노란 꽃술을 터뜨리고 있었고, 안압지 연못가 언덕의 잔디도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전사관 교육을 받은 민석홍, 홍순문(洪淳文), 추연근(秋淵槿) 씨 등 제 1반이 국군사단에 파견돼 충주로 떠났고, 24일에는 제2반인 한우근, 최상두 씨등과 제3반인 나와 홍이섭 씨가 예천, 문경을 거쳐 태령(泰嶺) ‘이우리’재를 넘어 충주에 도착했다. 충주 시내는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어떤 집에는 음식을 먹다가 밥그릇에 수저를 꽂아 놓은 채 두고 간 밥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2반은 신림(神林)에 주둔한 제3 사단에, 제3반인 나와 홍이섭 씨는 단양읍에 주둔 중인 제5사단에 파견되어 첫 출근길에 올랐다.
우리 팀은 미10군단 문관자격으로 10군단 마크를 달고 미군 대위의 안내를 받아 단양에 있는 국군 5사단 사령부에 도착, 사단장인 민기식(閔起植) 준장에게 신고했다. 5사단은 마침 작전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이동하려는 참이어서 어수선했다. 홍이섭 씨와 나는 전파(全波)를 겨우 면한 군 취사장 한 모퉁이 거적문이 달린 단칸방에 짐을 풀고 5사단 종군의 첫 밤을 맞았다.
단양은 선영이 계신 곳이기도 한데 나의 종군의 제1보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듯 감개가 깊었다. 국군 5사단은 앞서 미군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패퇴(敗退)한 전선에 교대로 배치되어 최전방을 향해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전사관으로 군복무를 한 51년 1월 31일부터 중순까지 군 막사에서 ‘종군일기’를 썼다. 제10군단과 한국군 5사단에서 보낸 1·4후퇴 이후의 춥고 길었던 3개월은 내게 있어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 있고 뜻 길은 기간이었다. 비록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