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군일기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951년 3월 5일 청난(晴暖)
사단이 전방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무료한 7, 8일 간을 보내고 사단과 함께 이동한다. 우리는 차츰 바빠질 것이다.
제천을 거쳐 주천(酒泉)에 왔을 때 우리는 한결 기분이 밝아질 수 있었다.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명미(明媚)한 산수절경을 바라보며 사단사령부가 이곳에 머물렀으면 하는 순진한 희망을 걸어본다. 그러나 행렬을 계속 전진하고 있다. 갈수록 태산준령(泰山峻嶺), 토끼길 같은 강 베루와 베루, 양장(羊腸)같은 험로와 험로.... 트럭들은 조심조심 굴러간다. 새까맣게 탄 솔밭, 뭉게뭉게 검은 연기를 품고 있는 산봉우리, 전투지역에 접근한 것을 실감한다.
이윽고 도착한 곳,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안흘리 산길 화전민 부락. 여기가 우리 5사단 사령부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벽지. 경사진 옥수수 밭에 늘어선 여섯 개의 천막. 이것이 우리 5사단 본부.
깊은 골짜기 어디에선가 포성이 천지를 진동한다. 인민군과 중공군 혼성부대가 3km 전방 산복(山腹)에 포진하고 있는데, 어쩌면 적의 야습이 있을지도 모르니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민기식 사단장의 이야기다. 외투를 입고 군화를 신은 채 막사 북더기 속에서 싸늘하고 불안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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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가 종군기자로 있었던 5사단 사단장 민기식 씨 (사진은 육군참모총장 시절로 16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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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대설(大雪)
밤에 눈이 내려 오금이 빠진다. 교통은 완전 마비다. 이럴 때 만일의 사태라도 있다면 정말 진퇴양난이다.
앞서 취사장인 민가의 추녀 밑에서 앞산의 설경을 바라보며 홍이섭 선생과 함께 국말이 바가지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3월 9일 담(曇)
‘오바레이’ 카피와 일지수록. 첨삭이 극도로 불편하다. 전중(戰中)이니 어쩔 수 없기는 하나 일정한 치소가 없다. 식수를 못 마신지 수일. 고원(高原)의 적막 속 북더기 잠자리는 얼어 들어온다. 그러나 포연탄우(砲煙彈雨) 속, 눈 덮인 호(壕) 속의 우리 병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한 행복이다.
3월 11일 청후(晴後) 담(曇)
오늘은 최전방 전투지역을 시찰했다. 이번 공격 전에 공을 세운 36연대를 방문하여 전면(前面)고지에서 벌어진 전투현장을 바라보고 동연대의 작전상황을 파악했다.
상오 열한 시 사단의 작전참모 조 소령과 지프로, 연대본부가 있는 응촌(鷹村)으로 갔다. 눈녹은 물이 벌창하는 산골. 차 바퀴가 절반 씩 빠지는 언덕과 개천, 그 위에 퇴각하는 적이 지뢰를 묻어 통행이 지극히 위험하다. 우리가 탄 차는 우측은 절벽, 좌측은 개천인 완만한 계곡을 조심조심 더듬어갔다.
도중에서 만난 부상병들은 들것으로, 지게로, 혹은 업혀서 내려오고 있다. 선혈(鮮血)이 임리(淋漓)한 자들을 대하니 뼈끝이 저리고 눈물이 솟아 차마 바라볼 수조차 없다.
1km 지점 솔밭에서 전투는 벌어지고 있다. 소총과 기관총이 볶아지는 소리. 엄호하는 포성. 제트기 연대의 공습. 격렬한 섬멸전이다. 귀로에 술봉(峰)아래 쪽에서 수색대를 만나 전황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 몇 장의 생생한 기록화를 그린 것은 큰 수확이다.
3월 13일 양(陽)
잔설(殘雪)이 북향 산기슭에 있으나 계절은 봄이 완연하다. 어제 저녁에는 천막 사이로 초생달을 보았고 오늘 아침에는 시냇가 버들가지에 부풀어 오른 버들강아지를 보았다. 음력으로 2월 초순. 우수, 경칩이 어느덧 지나고 춘분절이 가까워졌다. 높은 나무에 앉았다 가는 산새의 울음소리도 애조(哀調)를 띤 것 같다.
3월 15일 양(陽)
아침부터 부산하다. 짐을 꾸리는 중에 미군 고문장교가 나를 찾는다. 불쑥 편지 한 통을 건네준다. 생소한 길, 군사우편병을 거쳐 내 손에 쥐어진 편지는 아내의 편지다. 내가 일찍이 이렇게 반가운 편지를 받아본 일이 있는가.... 같은 국내요, 떠난 지 그리 오래지 않건만 전화(戰禍)의 틈바구니에서 가족이 풍비박산한 상황에 처음으로 받은 아내의 글은 반가운 정도가 아니었다.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던 가죽의 안신(安身)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상오 10시 사단 이동. 차량의 행렬이 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오에 도착한 새 기지 횡성군 둔내면 시장터. 산 중의 소도시가 제법 아담했다. 지뢰를 제거하는 공병대의 작업이 분주하다. 며칠 전까지 여기에 중공군과 괴뢰군이 주둔해 있었다고 한 노인이 전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