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양난(陽暖)
작전참모 조 소령과 함께 지프로 30연대를 방문했다. 우측에 계류를 끼고 약 8km 진흙길을 달리는 동안 물레방아 돌아가는 산모퉁이를 돌아 논과 밭이 깔린 한 촌락을 지나면서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광경을 발견했다.
격전이 휩쓴 이 산촌 부락에 어느새 피난민들이 되돌아온 것인가.... 봄볕 따사로운 동네 앞 개천가 모래밭에 두 소녀가 공기놀이를 하고 있고 겨우 남아 있는 오막집 울타리에는 구겨진 태극기가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산가(山家)의 봄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며 한없이 평화롭다. 아아, 몹쓸 놈의 오랑캐들! 이 땅의 이 순박한 백성들이 무슨 원죄가 있어 이러한 시련을 겪어야 하나. 황폐한 조국산하. 불쌍한 동포형제들 천우(天佑) 있으시라.
30연대 수색대 책임장교를 만나 전과를 상세히 듣고 밤에 3대대장 이규승(李圭昇) 소령을 만나 이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세한 경과를 듣는 한편, 이 대장의 배려로 사선(死線)을 넘어 직접 적의 참호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한 소대 병사 4명도 면접했다. 빈약한 장비로 육탄 돌격한 이 네 명의 용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어지는 강한 충동을 받았다.
이날 밤 홍이섭 교수와 나는 이규승 대대장의 숙소인 민가의 온돌방에서 같이 잤다. 밤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이 대대장은 위엄과 사랑으로 부하들을 부하를 다룰 줄 아는 군인이었다.
3월 19일(晴)
오늘의 암호 ‘코끼리 토끼’. 천막 틈으로 달빛이 스며든다. 음력으로 2월 보름이 가까운 모양이다. 가끔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귀심(歸心)이 여시(如矢)다.
3월 20일(陽)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날이다. 미 10군단 사령관 앨먼드 중장이 오늘 은성(銀星), 동성(銅星) 훈장을 휴대하고 한국군 5사단 본부에 왔다.
사단에서는 아침부터 대청소를 실시하고 의장병 사열ㆍ군악대 정비ㆍ복장통일 등 부산하다.
전진(戰塵)을 털고 사단본부에 모여드는 병사들 중에는 수류탄을 손에 들고 적의 토치카에 뛰어들었던 네 명의 용사도 끼어 있으리라.
정각 하오 두시. 앨먼드 중장은 헬리콥터 편으로 사단본무 마당에 내렸다. 오늘의 시상은 한국군 5사단이 먼저 미군이 패퇴한 공로를 세워 당연한 포상을 받는 것이다.
3월 23일(暖)
점촌(店村)에 와서 일박(一泊). 쾌청(快晴)에 따스한 날씨다. 마침 점촌 장날인 듯. 전화 속에서도 장이 섰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하여 결사적인가 보다. 장터를 돌아보며 생기를 느끼고, 봄씨앗과 더덕, 씨감자를 늘어놓은 노점 앞에서 나는 일말의 생의 환희 같은 것을 되찾았다.
나의 고향에도 봄은 왔으리라. 봄의 양광(陽光)을 받은 흙은 수분을 머금고 생명의 씨앗을 기다리려나....
이 고장은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기만 하다. 문 앞에 기대 선 한가한 아낙네. 뜨락에서 놀고 있는 조무래기들. 봄물이 넘쳐 흐르는 논두렁에 소 몰고 지나가는 촌로(村老). 이 모두가 평화로운 우리 농촌의 서정이 아니던가.... 아아, 평화가 그립다. 한 없이 그립다.
3월 25일(雨)
뜻밖에 아내의 두 번째 편지를 받았다. 뛸 듯 반가웠으나 가족의 곤경을 알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의 가족은 내가 염려했던 그대로 불행 속을 헤매고 있다.
기아에 직면한 분신인 나의 가족, 친척들. 그들은 이 무력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야겠다.
4월 1일(晴後) 담(曇)
보고용 주봉일경(主峰一景)을 추가로 그렸다. 그림이 될 리가 없다. 기계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 밤에 쇼트 소령을 방문, 사의(辭意)를 전했다. 쇼트 소령은 재차 전선행(戰線行)을 종용. 불안정한 기분이다. 장차 가족들의 생계를 생각할 때 그저 막연할 뿐이다.
4월 7일(晴)
쾌청한 날씨다. 그동안 정들었던 G3를 뒤로 홍이섭 선생과 같이 트럭에 올랐다. 죽령(竹嶺)을 넘어 풍기(風基), 영주(榮州)를 거쳐 안동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차 편으로 우보(佑保)에 와서 차 중에서 밤을 새웠다.
4월 8일(陽)
봄의 양광(陽光)이 눈부신 아침 다시 트럭 편으로 우보를 출발, 하오 5시 30분 대구에서 내렸다. 홍이섭 씨는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민석홍 씨는 서울로, 나도 가족이 있는 대전으로 각각 헤어졌다.
밤 0시 30분 기차로 대전역에 내려 철도경찰로부터 그 날의 암호 ‘서울-수원’을 알아가지고 대전 시내 대사동, 가족이 있는 곳으로 직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