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뜻밖에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 박사를 만났다. 어느 날 송도 뒷산 서울대 미술대학 가교사로 웬 노인 한 분이 찾아왔는데, 통성명을 해보니 <충무공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일재 권승하(逸齋 權承夏) 씨였다. 첫눈에 봐도 교양 있는 선비 같은 인상이었다.
권 씨는 “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인 조병옥 박사가 장 선생을 한번 만나기를 원한다“면서 사무실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이때까지 유석의 이름만 알았지, 그가 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권 씨에게 사유를 물었더니 가보면 안다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궁금도 했지만 유석이 인편을 보내 만나자고 청한 만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권 씨가 가르쳐 준 주소를 들고 남포동에 있는 홍문관(弘文館)출판사를 찾아갔다. 유석은 <홍문관출판사>의 방을 한 칸 빌려 쓰고 있는 중인데, 나와 초면인데도 구면처럼 친절하게 대했다. 수인사 후에 용건을 물었더니 유석은 이 충무공 영정 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석은 ”아산 현충사(牙山 顯忠祠)에 이 충무공 영정을 새로 모셔야겠기에 여러 사람에게 수소문해봤더니 월전이 가장 적임이라고 해서 부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현충사에는 청전 이상범이 그린 초상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랬더니 유석은 ”청전의 그림은 오래되어 낡았을 뿐만 아니라 작아서 적당치 않기 때문“이라고 다시 그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유석은 새 영정은 ”정말 이 충무공 다운 씩씩한 영정을 만들고 싶은 것이 사업회의 희망“이라고 부연했다.
나는 ”이런 중대한 일을 당장 이러고 저러고 말할 순 없지만 일을 맡겨주면 나도 이 충무공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미력이나마 정성을 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유석은 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충무공에 대한 고증자료가 별로 없으니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과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를 읽어보고 충무공의 참모습을 찾아서 그려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마침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선생이 부산에 내려와 계시니 그 분을 찾아가 고증을 받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일어서려는 참인데 권 선생이 ”시간이 촉박해서 참고서적을 다 읽을 수가 없을 테니 충무공전서와 징비록의 주요한 대목을 찾아주겠다“고 친절을 베풀었다.
며칠 후 권 씨는 <충무공전서>의 참고할 대목에 붓으로 붉은색 비점(批點), 권점(圈點)을 잔뜩 찍어가지고 송도 산중에 있는 원두막 같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나는 여러 차례 <충무공전서>를 되풀이해 읽으며 이 충무공의 찾기 위하여 고심했다. 나는 지금도 상ㆍ하권으로 된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 충무공이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려나 백의종군(白衣從軍)할 때 마침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아산 ‘뱀밭’ 고향 집에 들러 어머니 상청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나라에 충성하려 해도 나라가 알아주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려니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말해 많은 사람들은 충무공의 지극한 애국충정과 부모에 대한 끔찍한 효성에 감누(感淚)를 뿌렸다.
이 충무공이 전선으로 돌아왔을 때는 수많은 전함은 모두 없어졌고 겨우 12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 원균(元均)의 패전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충무공은 “상유십이(尙有十二. 아직 열두 척이 남았다)”라고 임금께 장계(狀啓)를 올려 희망이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전선(戰船)을 다시 정비, 수군의 위세를 바로 잡았다. 한 마디로 이 충무공은 하늘이 내린 충신이요, 효자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 충무공의 참 모습을 찾기 위해 <징비록>에서 말한 “이 충무공은 과묵하여 마치 수양 근신하는 선비와 같고 그런 중에도 담기가 큰 사람(寡言笑容貌雅飭 如修謹之士中有膽氣)”이란 대목에 주목하면서 과묵한 얼굴, 선비 같은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담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로 상당히 고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