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고민 고민 하다가 유석의 조언대로 육당 선생을 찾아갔다. 인사를 드리고 이 충무공 영정 때문에 선생의 고견을 들으러 왔다고 하니까, 그 분은 대뜸 “징비록 읽었느냐?”고 물었다. 육당은 거두절미하고 “선비 같다고 해서 나약한 선비로만 그리면 안 돼”하고 쐐기를 박았다. 그 순간 머리에 어떤 섬광 같은 것이 스쳐갔다. 침착하고 엄숙한 얼굴 모습, 번쩍이는 눈빛, 태산 같은 위엄, 이것이 충무공의 진면목이라는 확신이 섰다.
참고도 할 겸 충무공의 출생지 현장을 탐사하고 이 충무공의 후손을 만나 얼굴 모습, 골격 등도 살펴보고 싶었다. 며칠 뒤 권 선생과 함께 기차 편으로 아산 온양에 내려 <현충사>에 갔다. 종손 이웅렬(李應烈) 씨 집에 3일 동안 머무르면서 세심하게 관찰하고 충모공의 체취가 어린 유물들을 접해보고 장검(長劍) 각대(角帶) 등을 스케치했다.
현충사에 봉인되어 있는 청전 이상범이 그린 이 충무공 영정은 충무공이 손에 지휘봉을 쥐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상이었다. 퇴색해서 마치 <삼국지(三國志)> 표지에 나오는 관운장(關雲長) 그림처럼 알록달록했고 구군복(具軍服) 사람인데도 오래되고 작아서인지 위엄이 없어 보였다.
부산에 내려와 제작에 착수하려고 하니 재료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고증도 미흡한 것 같아 얼마 후 다시 권 씨와 함께 아산 현충사에 올라갔다. 이번에는 영정을 봉안할 자리도 살펴보고 어느 정도로 크게 그려야 할지도 가늠해봤다. 자를 가지고 실제로 재보니 높이는 약 7자, 폭은 4자쯤이 적당한 듯 했다.
현장을 두 번째 답사하고 부산에 돌아와 충무공기념사업회에 정식으로 영정제작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기본 재료인 회견(繪絹)과 제책 등 구입해야 할 필요한 품목도 적어냈다. 유석은 이당 선생이 그린 이 충무공의 무장본(武裝本) 사진을 참고하라고 내놓으면서 “좀 더 씩씩하게 그려달라”고 새삼 당부했다.
기념사업회는 일본에 내왕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동경 유편당(有便堂)에서 내가 적은 비단과 제책을 구해왔다. 기념사업회에서 보내온 재료를 받은 직후 환도선풍이 불었다. 미술대학도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어 영정제작은 환도 후에 하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와 보니 전에 살던 혜화동 195번지 서울대 관사는 문자 그대로 폐허였다. 울타리 판자는 없어져 허허벌판이고 문짝도 없어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상태였다.
이웃 노(盧) 씨 집은 일찍 돌아왔는지 그래도 생활할 수 있게 정리되어 있었기에 우선 노 씨 집 건넌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이튿날 일찍 일어나 집 안팎을 정리하고 간단한 집수리로 입주할 채비를 갖추고 나서 팔조방 판자 위에 돗자리를 깔아 작품제작을 위한 화실을 마련, 며칠 후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영정을 제작하는 동안 최대의 성의와 노력을 기울여 완벽을 기하려 했다. 초본을 완성해서 고증위원회에 제출하고 몇 번 수정을 가한 다음 정본에 착수했는데, 첫째로 위엄 있는 얼굴 모습과 깊이 있어 보이는 눈빛[眼光]이 무난하다는 평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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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무공 영정 / 1958년. 120*280. 아산 현충사 봉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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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53년 10월 7일, 아산 현충사에 충무공의 새 초상화 봉안식이 거행되었다. 영정은 표구를 끝내고 완전 포장, 특별 자동차 편으로 온양을 거쳐 아산에 도착했다.
정오 열한 시 성낙서(成樂緖)충남 지사, 왕동원(王東原) 주한 중국대사가 참석, 만국기가 펄럭이고 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 충무공의 새 영정이 봉안되었다. 왕동원 대사는 특별히 봉안식에 참석, 임진왜란 때 참석한 명(明)나라 장수 진린(陳璘)이 이순신 장군을 찬(讚)한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하늘과 땅을 누비는 재목이고 태양을 빛나게 하고 하늘의 뜻을 밝히는 공로)”이란 말을 인용하여 뜻 깊은 축사를 했다.
이 해(1953년)는 국가적으로 휴전이 이루어진 중요한 해지만 내게 있어서도 못잊을 해였다. 환도직후 서울대 관사에서 아들(장형구 張亨九)을 낳고 그 집에서 충무공의 새 영정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