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공부를 하는 한편 글씨도 공부하기 위해 당대 서단(書壇)의 일인자인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선생이 지도하는 상서회(尙書會)에도 나갔다. 상서회는 지금의 을지로 입구 미륭상사 뒷골목 개천가에 있었다. 청계천 지류인 이 개천의 양쪽에는 조선기와집이 줄지어 섰고 개천을 연결하는 다리가 여럿 있었다. 두 번째 다리를 건너면 바로 개천가에 잇는 큰 기와집 사랑채에 ‘尙書會(상서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 집이 바로 단우 이용문(丹宇 李容汶)의 집이다.
단우는 고종 때 내부협판(內部協辦)으로 오랫동안 궁중살림을 맡았던 이봉래(李鳳來)의 아들이다. 그도 참령(參領) 벼슬에 올라 권부(權富)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단우는 서화에 능해 「선전(鮮展)」에도 입선한 실력자일 뿐만 아니라 서화골동 수집가로도 이름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성당의 서예지도방을 마련해 준 것이다.
성당은 지금의 중추원(中樞院)에서 글씨를 쓰는 서원(書員)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黃山谷體)를 잘 써서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상서회는 매주 금요일 하오 3시에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글씨공부를 했는데, 내가 입회할 무렵에는 회원이 10여 명밖에 안되었다. 한국 사람으로는 소전 손재형(素荃 孫在馨)과 이병학(李炳學), 그리고 나뿐이었고 나머지는 일본사람으로 모두 40대의 회사사장, 중역들이엇다. 성당은 일본사람에게는 일본말을 쓰고 한국사람에게는 한국말을 했다.
그때 상서회에서는 내가 최연소자였다. 나는 상서회에서 처음 소전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내 나이 21세였으니까 소전은 나보다 9년 위인 30세였다. 이병학은 체격이 크고 말수가 적어 좀 무뚝뚝한 사람같이 보였으나 겸손했다. 성당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해 좀 뒤뚱거리는 편이었고 목소리는 허스키인데다 저음이었으며 상고머리를 즐겨 깎았다.
회원들은 상서회에 나오면 2간 장방에 놓여 있는 중국제 화류탁자에 원형으로 둘러앉아 선생의 체본(體本) 쓰는 것을 지켜봤다. 이 화류탁자는 큰 장방형이어서 열 사람이 앉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소문에 따르면 이 탁자는 단우(이용문)가 중국에 가서 옛 황실에서 쓰던 물건을 사올 때 같이 들여온 것이라고 했다. 물론 목재도 훌륭하고 조각도 뛰어났다.
성당은 상서회에 나와서는 두루마기를 벗어놓고 아랫목에 앉아 탁자 위에 종이를 펴고 체본을 써주었는데 큰 붓꼭두를 잡고 팔을 든 채 한 자 쓰고 종이를 쭉 올리고 또 한 자 쓰고 종이를 올리곤 했다. 매우 인상적인 것은 글자 한 자 쓰는 동안 숨을 참고 한 자 쓰고 나서 숨을 모두어 쉬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신통일을 위해 중요한 동작인 것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해서 각자의 수준에 맞게 차례대로 체본을 써주고 그걸 가지고 일주일간 집에서 연습해서 숙제를 가져오도록 했다.
내가 상서회에 처음 들어간 날 여러 사람 앞에서 붓글씨 시험을 보았는데 법첩(法帖)을 내놓고 써보라고 했다. 집에서 한문공부를 하면서 할아버님에게 배운 대로 침착하게 써내려갔다. 성당은 내 글씨를 보더니 “배운 글씨로구먼”하고 칭찬해줬다.
이 무렵 상서회원들은 모두 남대문통에 있는 지물포 영인창(永仁昌)에서 비싼 화선지(畵宣紙)나 옥판선지(玉板宣紙)를 사서 쓰고 있었다. 성당은 출품하는 것도 아니고 연습하는 데 이렇게 좋은 종이를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싼 종이 파는 데를 가르쳐 줬다. 마포형무소에서 죄수들이 만드는 종이가 그것인데 발자국은 있어도 먹이 잘 먹어 글씨연습을 하는 데는 적당했다. 나는 선생이 알려준 대로 전차를 타고 예전 마포아파트 자리에 있던 형무소에 가서 종이를 사다 썼다. 철문 밖 수부에서 “종이 사러 왔다”고 말하면 옆문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형무소 안에 들어가면 종이 말고도 죄수들이 만든 물건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