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당한 문교부차관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대한미협 대표들은 나오지 않았고 우리들만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여당 국회의원들은 검사가 피의자 다루 듯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부터 시켰다. 그들은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서 화가들이 그림이나 그리면 됐지 무슨 싸움이냐고 언성을 높혀 힐문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와 이순석, 김병기 등 한국미술가협회 대표들은 여당 국회의원 앞에서 우리의 의사를 개진할 겨를도 없이 납작 당하고만 나왔다. 그들은 왜 대한미협을 분열시켰느냐고 나무랐다.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에게 당한 내용을 전체회의에 보고했다. 회원들은 모두 격분해서 대책을 강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한미협에서 여당을 업고 싸움을 걸어왔으니 응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국회에도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으니 한국미술가협회는 야당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느니, 여당국회의원들이 왜 일방적으로 한국미술가협회만 몰아붙이는지 그 배경부터 알아봐야 한다느니 의견이 분분했다. 회의에서는 먼저 배경을 알아보고 나서 투쟁방법을 의논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우리들을 조사한 이존화, 표영문, 손문경 의원 등의 대한미협 측의 불재 윤효중과 각별한 사이인 것을 알았다. 뿐만 아니라 불재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만든 사람이어서 그 당시만 해도 속된 말로 상당한 끗발이 있었다.
불재는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 이미 <선전>시대애 이름을 떨친 조각가이고, 원래 활동적이고 매사에 적극적인 그는 부산 피난 중 대한미협에 적극 협력, 고희동의 환심을 산 사람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제작하느라 번번이 경무대에 드나들면서 여당 간부와도 잦은 접촉을 가졌다. 원래 사교적인 불재는 주위에 많은 사람을 거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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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재 윤효중 사진출처 : [mu-um.com 캡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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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6ㆍ25동란 뒤끝이어서 너나없이 먹고살기 힘들 때였는데, 불재는 원래 생활도 넉넉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만들어 거액(1억 3천만환)을 받아 삼선교에 3천여 평의 땅을 마련, 집도 짓고, 자가용이 거의 없을 그 당시 자가용차(지프)도 굴리고 있었다. 이 무렵 명동에 나갔다가 불재에게 술을 얻어먹지 못한 사람(특히 화가, 조각가)은 바보소리를 들을 만큼 술 인심도 후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도 모으고 영향력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우석 장발은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를 마치고 미국에 건너가 콜롬비아대학에서 미술 및 미술사를 전공한 엘리트. 해방직후 서울시 학무과장으로 서울대 미술대학을 만드는데 산파역살을 했고 뒤에 미술대학장을 맡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질이 깐깐해서 외곬으로 나가는 고집쟁이이고 해외파여서 새로운 미술사조에도 밝아 무엇 하나 꿀리는 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서울대를 장악하고 있어 그것이 한국미술가협회를 이끄는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불재와 우석이 특별한 이유 없이 반목의 사이가 된 것은 대한미협과 한국미술가협회의 분쟁에 기인한 것이다.
한국미술가협회는 과거 여러 면으로 알아본 뒤 우석이 당시 야당의 지도자였던 장면(張勉) 씨의 동생이라는 점과 불재가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과 정부와 고급관리를 싸고 도는 것을 볼 때 한국미협이 호소할 곳은 야당밖에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래서 문교부차관실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이순석, 김병기와 내가 야당 국회의원으로 문교분과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는 깐깐한 선비정치가 운재 윤재술(云齋 尹濟述) 의원과 청렴하기로 소문난 이태용(李泰鎔) 의원을 만났다. 동아일보사 뒤편에 있는 어느 2층 다방에서 두 의원을 만나 우리들은 문교부차관실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일, 전시회 장소 못 빌린 일, 대한미협에서 갈라 선 이유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 분들도 “그럴 수가 있느냐”고 분개했다. 우리들은 지금 “대한미협이 여당을 업고 한국미술가협회를 압박한다”고 설명, 두 의원에게 도움을 청해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리하여 대한미협은 여당의 지원을, 한국미술가협회는 야당의 도움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미술단체의 분규는 국회 문공위에 들어가 여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여야싸움이 될 기미마저 보이자 문교부가 국회 문공위원을 초대, 반도호텔에서 미술인 젼체회의를 소집하고, 화해무드를 조성했지만 이 같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