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호텔에서 열린 미술인 총회는 화해는커녕, 갑론을박으로 대한미협과 한국미술가협회의 두 번째 교전장이 되었다. 한국미술가협회는 회의 성격도 몰랐을 뿐 아니라 꼭 나와야 한다는 문교부의 으름장 때문에 몇 사람이라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장인 반도호텔 정문 오른쪽에 있는 큰 홀은 꽤나 혼란스러웠다. 고희동, 이종우, 이마동, 도상봉 등 대한미협의 간부들이 의자에 떡 버티고 앉아 있었고, 표양문 의원은 문 앞에서 설치고 다녔다.
우리 일행은 안내를 받아 뒤쪽에 앉아 대한미협의 거동부터 살폈다. 가만히 보니 대한미협 측에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수적으로도 한국미술가협회를 압도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 우리도 사람을 시켜 인력 동원을 해야만 했다. 부랴부랴 서둘러 몇 군데 연락, 10여명의 회원이 나왔다. 대한미협을 후원하는 이존화, 표양문, 손문경 등 여당 의원들은 빠짐없이 나와 있는데, 한국미협을 도와주겠다는 야당 의원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표양문 의원이 등단하여 핏대를 올리면서 화합을 강조하는 말을 일장 훈시를 했다. 이때서야 윤제술 의원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다음에 윤효중이 나가서 단일 미협(美協)을 만들자고 제안,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짜여 진 각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수로 표결하자, 안 된다”고 옥신각신 하는데, 이번에는 이존화 의원이 일어나 대한미협을 두둔하는 발언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잠자코 앉아 있던 윤제술 의원이 벌떡 일어서더니 “국회의원이 무슨 할 일이 없어 미술단체 시비에 끼어드느냐”고 쏘아 붙였다. 장내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윤제술 씨는 이어 “미술단체의 일은 미술가들에게 맡기고 국회의원들은 가서 국사(國事)나 보라”면서 휑하니 나가버렸다.
윤 씨의 일침에 여당 국회의원들은 머쓱해졌다. 아주 난처한 기색이었다. 대한미협 측에서는 여당 의원들이 퇴장할세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표결 공작을 시도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한국미술가협회 회원들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누군가가 “갑시다”하고 일어서는 바람에 모두 나와 버렸다.
문교부는 화해 회의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자 막후 접촉을 통해 대한미협 측에서 심사위원 세 명을 추가토록 하여 <국전>보이코트를 매듭지었다. 결국 제5회 국전은 예년에 비해 한 달이나 늦게 열려(11월 10일) 20일간 계속되었다. 국전이 열리자, 이번에는 한국미술가협회 측에서 서세옥, 김세중 등 젊은 회원 10여명이 출품을 거부함으로써 당국이 대한미협에 굴복한 일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심사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미스런 일도 일어났다. 동양화 분과에서 소정(변관식)과 심산(노수현)이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다. 오전 심사를 마치고 국전 주관처인 문교부가 점심을 내는 자리(高麗亭)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심사 중 의견대립과 평상시에 쌓였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당시 동양화부 심사위원은 고희동, 이상범, 배렴, 노수현, 장우성, 변관식, 최우석, 허백련, 김은호 등 아홉 명이었다.
|
|
| ▲ 소정 변관식 [사진출처 : 성북미술관 전시회 도록] |
|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여담을 나누다가 몇 마디 큰 소리가 오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냉면을 담았던 놋대접이 휙 날아갔다. 냉면 그릇을 던진 사람은 소정, 맞은 사람은 심산이다. 성격이 괄괄한 소정이 오전 심사과정에서 심산과 다툰 일이 마음에 맺혔던지, 분을 터뜨린 것이다.
심산은 놋대접을 맞자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손수건으로 누르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이 꼴을 보고 있던 다른 심사위원들이 소정을 향해 “점잖지 않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핀잔을 주고는 차를 불러 심산을 태워 김성진 외과에 가서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
이 사건의 근인은 심사과정에서의 의견대립이지만, 원인은 평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초기 국전에서 소외당한 이당과 소정이 그 당시 국전 중심세력이던 심산, 청전, 제당(배렴)과 반목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위 예술인이고 나이든 사람들이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유감천만의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