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서울장안에는 몇 군데의 화숙(畵塾)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누하동(樓下洞) 182에 자리 잡고 있던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화숙과 수송동(壽松洞) 태고사(太古寺) 뒷골목의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화숙이었다.
청전은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과 함께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의 제자여서 이당과 연원이 같았다. 이당, 청전, 심산이 모두 심전 안중식, 소림(조석진)에게서 배웠지만 서로 화맥을 달리했다. 이당은 북종화(北宗畵), 청전, 심산은 남종화(南宗畵) 경향이 짙었다. 청전, 심산은 이당보다 여러 살 아래여서인지 별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
청전, 심산이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에 다니면서 야주개(지금의 당주동 唐珠洞) 세종문화회관 근처에 있던 심전 화숙인 경묵당(耕墨堂)에 드나들 때 이당은 어진(御眞)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경묵당엔 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당은 서화미술회에서 주로 소림, 심전의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심전은 ‘무릎제자’인 청전과 심산 두 사람을 지극히 아껴서 자신의 아호 ‘심전(心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나누어주어 청전, 심산이란 호를 내렸다고 들었다. 특히 청전에게는 ‘청년 심전’이란 뜻으로 청전(靑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총애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당의 아호도 심전이 주역(周易)의 24괘(卦)가 ‘이(以)’자로 시작되고 『시전(詩傳)』에도 “일중성조 이은중춘(日中聲鳥 以殷仲春)”이란 구절이 있어 획이 적고 부르기가 양명(陽明)한 이당(以堂)으로 지어주었다지만 청전 만큼은 귀여움이 덜했던 것 같다.
청전은 심전의 후광도 있었지만 「선전」에서 특선을 많이 해 화명(畫名)이 높았다. 하지만 이당 화숙만큼 사람이 몰려들지 않았다. 청전 화숙에서 그림공부를 한 사람은 청전의 맏아들 이건영(李健英), 「선전」 시대 우리와 경합했던 청계 정종여(靑谿 鄭鍾汝), 제당 배렴(霽堂 裵濂) 등이다.
제당은 처음에 심향(박승무)에게 그림을 배우러 갔으나 이 양반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제자를 두지 않고 즉시 제당의 손을 잡고 청전의 집에 찾아가서 인계했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안국동에 살면서 누하동(樓下洞) 청전 화숙에 다니던 제당과 길에서 첫인사를 나눴다. 그때 제당은 늘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그렇게 자상하고 친절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우의를 다져 1968년 그가 타계할 때까지 자별하게 지냈다.
해강은 서예와 산수(山水), 난죽(蘭竹)으로 이름 있는 서화가였던 외숙인 소남 이희수(小南 李喜秀)에게서 글과 그림을 배우고, 당대의 명필 눌인 조광진(訥人 趙匡振)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청강 김영기(晴江 金永基)의 엄친인 해강은 영친왕에게 글씨를 가르친 사부(師父)여서 세도도 당당했다. 그때 이미 환갑(1868년생)이 지난 노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가 가장 먼저(1915년) 「海岡(해강)서화연구회」란 것을 만들어 후진을 양성했는데 해강은 주로 서예와 난죽으로 이름을 날렸고 초기 제자로는 나중에 나와도 교분을 나눈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과 우금 이규원(又琴 李圭元,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종찬 李鍾贊 장군의 아버지)이 있었다.
중기 제자는 나와 제당, 소전, 남농과 허물없이 지내던 고암 이응로(顧菴 李應魯)와 소청 강신문(紹靑 姜信文, 서화학교 서예교사 청운 강진희 靑雲 姜璡熙의 아들)이다. 말기 제자로는 설해 민택기(雪海 閔宅基)와 약운 윤희채(藥雲 尹禧采)가 있다. 설해는 눈오는 날 문하에 입문했다고 해서 해강이 붙여준 호다. 설해는 해강이 1930년 겨울 경기도 양주에 있는 전원서옥(田園書屋)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33년 6월 타계할 때까지 마지막 제자로 뒷바라지했다.
원서동 막바지에 있던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댁에도 서화가가 많이 모였지만 이렇다 할 제자를 양성한 일은 없다. 묵로 이용우(墨鷺 李用雨)가 춘곡의 사랑방 손님이었는데 여기서 작품도 했다고 한다. 여러 장 그려서 방바닥에 늘어놓으면 춘곡이 이건 잘됐고 저건 잘 못됐다고 평했다고 한다.
심산도 원서동에 살았는데 제당이 조금 사사했을 뿐 문하생을 받은 일은 없고 후에 나와 함께 서울대에서 후학을 지도했을 뿐이다.
지방이지만 광주에서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1936년에 이당의 제자 모임인 후소회(後素會)가 창립되었고 1939년에 의재 문하생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가 창립전을 열었다. 거리관계였던지 제자들끼리는 별 내왕이 없었으나 이당과 의재는 친분이 깊어 의재가 서울에 오면 꼭 서로 만났다.
당시 대부분의 화숙에서는 실기 위주였고 미술사나 예술론 같은 예술의 기본이론은 거의 배울 기회가 없어 후진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후진들은 오로지 선생의 화풍을 본받아 이름있는 화가가 되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이러한 타성에서 벗어나려는 일부 신예들은 나름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서적을 구해 잠심(潛心)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리하여 근대 우리 화단은 유감스럽게도 ‘쟁이’만을 양산한 결과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때 의욕적인 젊은 화학도들은 미술사나 화론같은 예술의 기본학문을 배울 기회가 적은 것이 가장 아쉬운 문제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절실한 것이 미술재료의 구입이었다. 채색과 회견(繪絹) 같은 기본재료를 들여다 파는 상점도 없고 그런 것을 구하기 위해 외국에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라 전시회 준비라도 할 때면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본정 2정목(本町 二丁目:혼마치 니쵸메, 지금의 충무로 2가)에 ‘호리자키(堀崎)’ 라는 일본인 가게에서 소규모로 일제 채색을 팔고 있었는데 구멍가게 규모여서 종류도 많지 않고 수량도 적었지만 서울의 유일한 동양화 미술재료점이어서 아쉬운 대로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대작이라도 그릴 경우에는 일본 본토의 큰 상점에 편지주문해서 받아 썼는데 내가 주로 거래한 곳은 일본 기후현(崎阜縣)에 있는 ‘타와다(多和田)’ 형제상회였다. 물목을 적어서 편지로 주문하면 3주일쯤 걸려 우편으로 오는데 대금은 우체국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받아오는 대금인환(代金引換) 방식으로 결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