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인가, 서울신문사가 주관해서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전(頌壽展)을 열었다. 하루는 철농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중앙청 식당으로 좀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전화로는 할 이야기가 아니라면서 나와 보면 알 것이라고 만날 시간만 알려주었다.
정한 시간에 중앙청 식당엘 갔더니 철농 외에 소전(손재형)과 제당(배렴)도 나와 있었다. 그때는 소전이 국회의원 시절이라 자주 만나지 못하던 판이어서 반갑게 담소를 나누었다.
주관하는 서울신문사 책임자가 미처 나오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제서야 철농이 이 대통령의 송수전을 연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서울신문사가 주관은 하지만 많은 미술인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며 동양화와 서예의 대표적인 세 분을 모셨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철농의 엄친 이세정(전 진명여교 교장) 씨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에 관계하고 있고 이승만 대통령과도 가까이 지낼 뿐만 아니라 철농 자신도 이 대통령의 직인과 사인 등을 전각해 그 분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일에 앞장서게 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 모임이 뜻밖에 오해를 물러 일으켜 내 일생의 하나의 오점이 되어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우연찮게도 나와 소전이 정답게 이야기 하는 장면을 내 제자 한 사람이 계획적으로 엿보았다. 그 무렵 서울대 미술대학에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학장운동을 한다고 모략을 한 자가 있어 장발 학장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략의 내용인즉 내가 문교분과위원장인 소전에게 이력서를 주고 학장이 되도록 부탁했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소전은 평상시 너무 친했기 때문에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누군가가 이런 연극을 꾸민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연극을 꾸몄을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서을대 미술대학의 교수 자리를 노리던 자가 소전을 통해 장발 학장에게 취직 부탁을 했던 보양이다. 장 학장이 TO가 없어 안 되겠다고 거절했더니 그 자가 자리를 만들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고 장발 씨와 나를 이간한 것 같았다.
그 자는 학장운동 소문이 장발 씨에게 들어갈 것을 겨냥하고 당시 미술대 교수이며 장 학장의 측근인 박갑성(朴甲成) 씨에게 ”소전 선생이 호주머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보이면서, 이게 월전이 미술대학장을 시켜달라고 내게 맡긴 이력서야“하더라고 말을 흘렸다. 박갑성 씨도 설마 했지만 나와 소전이 워낙 친해서 혹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말을 장 학장에게 전했던 모양이다.
박갑성 씨가 그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전에 정보를 준 그 자가 ”월전과 소전이 중앙청 식당에서 만나 비밀 이야기를 나누더라“는 두 번째 정보를 전했다. 우리가 중앙청 식당에서 이 대통령 송수전 이야기를 나눈 그 이튿날 박갑성 씨는 내게 슬며시 ”어제 중앙청 식당에서 소정을 만났다면서?“ 하고 물었다.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고 반문했더니 박갑성 씨는 ”아니 뭐......“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별 큰 일도 아니어서 그냥 넘겨 버렸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박갑성 씨는 정보를 제공한 자의 말이 꼭 맞는 것으로 속단, 장 학장에게 ”월전이 어제 또 중앙청 식당에서 소전과 만났다“고 말을 전했다. 장 학장은 극도로 흥분하고 상당히 불쾌했던 모양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람의 진의를 헤아리지 못하고 간단히 모략에 말려 넘어가는 한국사람의 단순한 기질을 이해하기 어렵다.
말이 여기까지 와 있는 줄도 모르고 장 학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전과 사뭇 달라 무슨 고까운 일이라도 있었는가 생각해봤지만 나에게는 별 일이 없었다. 예년 같으면 교무과장, 학생과장은 신입생 면접시험에 당연히 참여했었는데, 그 해에는 유독 나만 ‘개 밥의 도토리’처럼 따돌려 이상히 여기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알아봤지만 박갑성 씨마저 입장이 난처했던지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 자초지종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역으로 교묘하게도 그 정보제공자가 나를 만나자고 청해서 다방(조선호텔 옆 외교다방)에 갔더니, ”장 학장이 월전 선생을 대놓고 욕하더라“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했다 .그러면서 또 장 학장이 ”월전은 틀렸으니 이제부터 자네를 밀어주겠다“고 하더란 말까지 했다. 이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장 학장에게 따지기 위해 그 길로 바로 학교에 달려갔다.
그렇잖아도 장 학장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욕까지 하더라는 소리를 들으니 지금까지의 존경심이 없어지고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마저 사라졌다. 내가 미대에 들어간 이후 10여 년 동안 장 학장은 나에게 끔찍이 했었다. 서울대 관사도 다른 교수보다 우선적으로 배정해주었고, 내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여러 번 들러 조문하고 특별히 귀향하는 운구차(運柩車)까지 마련해주었으며 공사(公私) 간에 무슨 일이든 나와 의논하던 분이 아니었던가.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변하다니.....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이 분명했다.
